사제의 공간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松竹/김철이 2020. 5. 14. 00:15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묵상 듣기 : https://youtu.be/zEA4Zv6UJnE


어릴 때 많이 받았던 질문입니다. "대신 죽어줄 수 있는 친구가 있는가?", "너를 위해 대신 죽어줄만한 친구가 있는가?" 


지금은 아무도 이렇게 물어보지 않지만, 그 때 내 친구들 중 몇은 분명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누군가를 위해 죽을 수 있겠지만 누가 나를 위해 죽어줄 수 있는가의 문제는 전혀 자신 없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누구에게 그런 것을 바랄 이유도 없지만 말입니다. 


하느님과 사람이 친구가 될 수 있을까의 문제는 우리 신앙에서 전혀 고려하지 않는 문제입니다. 아무리 작은 '성직'이라도 사람들 사이에 구별되고 또 존중받는 세상이기에 그런 이들이 서로 친구가 된다는 것은 평등의 문제가 아니라 최소한 '고마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쩌다 나이가 같아 행운일 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서로 구분하기에 급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친구'라는 말을 꺼내십니다. 우리야 이 말씀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알아듣고 감사함을 표하지만 예수님의 이 선언은 진짜입니다. 예수님이 이야기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이 벗들에게 어떤 것도 비밀로 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알려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것을 알고 같은 삶을 사는 이는 더 이상 주인이나 종으로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이전부터 그들과 늘 같은 밥을 먹고 같이 살았습니다. 겸손하심이 아니라 처음부터 같은 밥상에서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같은 밥을 먹는 것은 같은 생명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나은 밥을 먹지 않고 같은 음식에 손을 대고 같이 이야기하는 것, 예수님은 우리가 말하는 평등으로 형제를 나타내셨습니다. 곧 선언이 아니라 실제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나처럼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그 '처럼'의 내용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형제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사랑이 하느님으로부터 왔음을 말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같은 형제의 아버지 하느님은 바로 그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이 이처럼 사랑하시고,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것.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서로를 그렇게 사랑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신앙의 내용입니다. 모두가 서로가 서로를 위해 죽을 수 있는 형제는 그렇게 사랑이 아니면 어떻게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깊이는 그래서 어떤 저울로도 잴 수 없는 가치입니다. 그런 사랑을 우리가 어디에서 받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만 모두가 그렇게 사랑해야 하기에 이런 의문이나 질문도 허망한 것이 됩니다. 


주님의 사랑은 조건문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에게 흘러내리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사랑에 조건보다 노력과 행복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이며 우리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