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①부 : 유서가 된 죽음 앞과 뒤를 책임진 사람 2002년을 누군가는 월드컵의 해로 기억하겠지만, 인천 장애운동사에서는 본격적인 장애인운동의 물꼬를 튼 해로 기억된다. 그해 5월 서울지하철 5호선 발산역에서는 중증장애인 윤재봉(당시 63세) 씨가 고정형 리프트를 이용하다가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울시 등 관계 당국 어느 곳 하나 책임지고 나서지 않았다. ‘장애인이동권연대’는 8월 12일부터 국가인권위원회 13층 위원장실을 점거하고 장애인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2000년대 초, 장애인들이 장애인이동권보장을 요구하며 지하철 선로를 점거한 모습. 다큐 ‘장애인이동권투쟁보고서-버스를 타자(박종필 감독)’ 캡처. 인천장애인교육권연대 김광백 사무국장은 당시 사회당 학생위원회 소속으로 일일 단식농성에 참여하기 위해서 현장을 찾았다가 박기연을 처음 만난다. “혹시 인천에서 온 분들이 있는지 찾아보니까 박경희 씨랑 박기연 씨 두 분이 있었어요. 셋이서 밥을 먹으러 가서 이야기를 나눴죠. 지역에서도 이런 거 해보면 어떻겠냐. 버스 타기 같은 거. 박경희 씨가 그런 말씀을 하셨고, 저는 학생이었으니까 학생들 중에 같이 할 사람 있는지 찾아보겠다고 했죠.” 그렇게 인천 장애인이동권연대를 만들기 위한 준비모임이 시작되었다. 박기연, 박경희, 김광백, 김덕중, 이진흠 등은 ‘장애인이동권 확보를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펼치면서 인천에 있는 장애인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 김덕중 씨가 걷거나 의사소통이 조금 되시는 분이셔서 이분 중심으로 지역 단체들을 만나러 다니셨거든요. 박기연 씨는 의사소통이나 이동지원이 많이 안 되니까 이동권연대 전체회의를 한다든가 서명운동할 때 자리를 지키셨고요.” 서명운동은 주로 부평역과 주안역, 동인천역의 지하상가와 인하대학교 등에서 오후 2시부터 저녁 9시 정도까지 진행되었다. 상당히 힘든 일정임에도 박기연은 매일 빠지지 않았다. 당시 인천 장애인이동권연대는 연대투쟁을 많이 다녔는데, 박기연은 이동권연대 활동가로서 이주민이나 성소수자 권리투쟁에도 참여했다. “투쟁할 때는 늘 제일 앞에 계시고, 제일 늦게 가셨죠. 말은 못 하지만 자리를 지켜주는 게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신 거 같아요. 자기가 여기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면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계셔요. 당시 콜택시나 이런 것도 없었는데 약속은 되게 잘 지키셨고.” 활동지원사가 없던 시기이므로 화장실을 가지 않기 위해 물이나 음식을 최소한으로 섭취하는 게 습관이 된 그였다. 빼빼 마른 몸으로 휠체어 위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은 고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기연은 엠마우스 회원들이나 다른 뇌병변장애인들을 만나서 집회 참가를 독려했다. 한 음절 한 음절에 온 힘을 실어 말해야 하는 그가 그들에게 주려고 고심해 선택한 문장 하나는 이것이었다. ‘이건 우리가 해야 되는 일 아니냐.’ 박기연에게 이동권 투쟁은 ‘나의 싸움’이었다. 그의 싸움은 시간이 지나면서 교육권 투쟁과 활동지원제도화 투쟁으로 확대되었다. 2004년 인뇌협 설립 후 박기연과 투쟁의 동지였던 신영노 지회장은 박기연의 투쟁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요, 그 삶의 권리를 바라는 거잖아요. 자기 권리를 자기가 찾겠다고. 그 형은 그게 다였어요. 저도 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우리들이 나와야지만 바뀌어요. 그냥 있으면 안 바뀌어요. 절대 안 바뀌어요. 그 형도 똑같았겠지. 아마 똑같을 거예요. 그렇게 고된 삶을 사느니 투쟁하는 게 낫지.” 박기연의 활동 당시 그와 만났던 사람들은 그가 활동지원을 받지 못해 신체 관리를 거의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고 말한다. 씻지 못한 얼굴엔 각질이 두껍게 쌓였다. 화장실을 가기 힘들어서이기도 했지만, 구강구조에도 문제가 있어서 음식을 잘 먹지 못했다. 사망 몇 달 전 장수술을 받게 된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해 협착이 왔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가 절실히 투쟁하고 있던 활동지원제도의 도입은 그에게 ‘생존권’의 문제였다. 박기연은 모퉁이에 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대신 삶과 투쟁하기로 마음먹었다. 장애인거주시설 폐쇄 투쟁을 하던 박기연 열사의 모습. 사진 인천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변화의 바람 속에서 박기연은 장애차별의 높은 벽 앞에 있었지만, 그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 또한 보았다. 인천에서는 2004년 부평, 남구, 계양, 연수구 등에서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2005년 4월 인천장애인교육권연대의 결성은 장애인 의제로 최초의 광범위한 연대활동이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2005년 7~8월에 걸친 인천시교육청 점거 투쟁은 당사자 중심의 운동이 본격화되는 전기였다.1) 이전에는 박기연이 전혀 상상해보지 못한 삶의 가능성이 눈앞에 펼쳐졌다. 인천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아래 민들레센터) 박길연 소장은 오랫동안 와상장애인의 삶을 살았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당시 박기연이 가졌을 마음을 조심스레 추측했다. “세상으로 나가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바깥세상이 굉장히 궁금한데 이 삶을 살아보지 않는 사람은 그 궁금함이 구체적이지 않아요. 근데 박기연 열사는 다니다 보니 좋은 것도 보였고, 다른 사람들하고 술 한 잔 곁들일 기회도 생겼어요. 아, 사람은 사회에서 살아야 하는 거구나 생생히 느꼈을 거 같아요.” 박기연과 함께 살았던 몇 달간 김광백이 경험한 박기연은 독립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같이 살면서 힘든 건 하나도 없었어요. 물론 육체적으로야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다른 일로는 피해 안 주기 위해서 고민을 많이 하셨던 거 같아요. 생활비를 내기 위해서 수급비도 잘 관리하셨고. 매사가 철저하셨던 분으로 기억이 나요. 서울에서 오전에 일정이 있다고 하면, 자는 거 씻는 거 다 조절하시면서 일찍 일어나서 옆에 있는 사람 깨워주시기도 하고 그랬죠. 뭔가를 많이 하고 싶어 하셨어요. 외출 준비해드리면 그냥 혼자 가세요. 어딘가로. 한참 안 오시다가 밤늦게 들어오시기도 하고. 혼자 잘 돌아다니시더라고요. 저녁에 혼자서 장도 보시고. 자기 카드 가지고 다니시면서 먹고 싶은 거나 자기 필요한 물건들을 사가지고 오셨죠. 집에 있으면 남한테 피해 주는 게 미안해서 돌아다닌 것도 있지만, 본인이 많은 데를 다니고 싶어 하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휠체어가 고장 나서 집에 있게 되면 답답해하시고 그랬죠.” 박기연은 늘 신세만 져야 하는 사람으로 머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더욱 많은 걸 보고 싶고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 마지못해 살기보다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을 원했을 것이다. 사람이란 존재가 대개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차이나타운이 자리한 언덕 꼭대기에 있는 자유공원에 올라 시간을 보내곤 했다. 분주한 인천항의 풍경이 그에게 무엇을 속삭였을까. 노을 지는 하늘에 어떤 말을 새겼을까. 금빛과 붉은빛으로 빛나는 거리에서 그는 어떤 향기를 맡았을까. 박기연 열사는 차이나타운 언덕 꼭대기에 있는 자유공원에 올라 자주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해질녁 자유공원에서 바라본 인천항의 풍경. 사진 박희정 그의 한마디 말 김광백이 기억하는 박기연은 갈등의 중재자이기도 했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활동한 인천 장애인이동권연대는 체계가 없었다. 서명운동이 끝나고 나면 매일 회의를 진행했는데 “중구난방”이었다. 개성 강한 구성원들 사이에 갈등도 잦았다. “이게 맞아 저게 맞아 논쟁하게 되면 기연이 형한테 항상 물어봐요. 이분이 결정하는 걸 따르자. 서로 명시적으로 합의하지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합의되어 있던 거 같아요. 말씀을 자세히 하시는 건 아니지만, 예를 들어 ‘논리적으로는 광백이 얘기가 맞을 수 있지만 장애인 입장에서 이게 맞는 거 같아.’ 반대로 ‘광백이는 장애인이 아니지만은 네 얘기가 맞는 거 같아.’ 이런 식으로 마지막에 정리를 해주는 역할을 많이 하셨어요. 다른 분들은 자기가 억울한 게 있으면 표현을 몸으로도 하시잖아요. 기연이 형은 그런 적은 없었고. 싸울 때는 잘 지켜봐 주세요. 누군가가 이야기하는 걸 끝까지 듣고서는 한마디 하시거든요. ‘좀 더 생각해보든가.’ 아니면 ‘내일 다시 얘기할까?’ 이렇게.” 박기연은 논쟁이 격화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모든 이의 말을 끝까지 듣고 내어놓는 그의 마지막 한 마디는 겨우 나온 말이 아니라 신중하게 나온 말이었다. 박기연의 한마디가 동지들에게 심판관 같은 무게를 지녔다는 건, 그가 가진 합리성에 대한 그들의 신뢰를 보여준다. 인뇌협 활동을 함께 한 신영노 역시 이 점에 동의했다. 2004년 설립된 인뇌협은 2005년도 여름, 인천장애인교육권연대가 교육청 점거 농성을 들어가 있던 도중 조직이 와해될 뻔한 위기를 겪는다. 당시 대표를 맡았던 이가 금전적 문제를 일으켰고, 문제가 불거지자 조직을 떠나버린 것이다. 장애운동의 불씨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와중에 불거진 대표의 부적절한 행위는 인뇌협 구성원들의 힘을 뺐다. “제가 사무국장이었거든요. 다시 조직을 꾸리는 과정 속에서 박기연 형이 전 대표한테 딱 한 마디 했어요. 다시 돌아오라고.” 그 말은 ‘우리의 곁’이 아니라 ‘옳은 길’로 돌아오라는 뜻이었다. 길이 아닌 길을 가지 말라는 부드럽고도 단호한 당부였다. 박기연은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삶의 태도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김광백은 그러한 박기연의 곁에 그에 대한 호감을 지닌 사람들이 많았다고 이야기한다. “같이 활동하셨던 분들 중에 유흥비를 벌기 위해 앵벌이를 하신 분도 계셨고, 자기가 이익을 못 얻으면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는 분도 계셨고, 그러면서 싸우고 나가신 분도 계시기도 하고. 그런데 기연이 형은 그런 것들과 비켜 있는 분. 우리 안에서 이분은 좀 성자 같은 느낌이 있었던 거 같아요. (웃음) 사람들이 기연이 형에 대해서 긍정적이니까 돌아가신 이후에 그렇게 모여서 투쟁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2005년도의 인천 교육권 투쟁은 인천지역 최초의 광범위한 연대투쟁이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성과도 많이 남겼다. 장애학생 무상급식이 시행되고 방과후 교육활동비 지급, 일반학교 내 특수학급 설치가 가속화되었다. 가시적 성과는 장애인 당사자 단체들에게 투쟁에 대한 자신감을 주었다. 또한 이 투쟁을 통해 장애인부모운동이 결집하고 진보적 시민사회단체들과 지속적인 연대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것이 현재 인천장애인운동의 뿌리가 되었다.2) 또한 2005년 4월 인천장애인교육권연대의 결성과 함께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중심으로 ‘420 장애인차별철폐 인천공동투쟁단(아래 인천420공투단)’도 결성되었다. 인천420공투단은 인천시와 싸워 장애인콜택시를 도입해낸다. 당시 서울에서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준비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인천의 장애운동가들도 교육권 투쟁으로 형성된 연대를 바탕으로 지역 안의 탄탄한 네트워크를 꾸릴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박기연의 비보가 전해졌다. “우리가 지역사회에서 사는 데 필요한 게 무엇일까 생각해봤을 때 가장 먼저 필요한 건 활동지원이었어요. 그때 서울이 활동지원제도화 투쟁을 하고 있었지만 굉장히 힘든 투쟁을 하고 있었고, 지역으로 이 투쟁이 확산될 수 있을까 고민도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이런 일이 생기면서 다들 화가 났죠. 분노한 거죠.” (민들레센터 박길연 센터장) “악으로 깡으로 그냥. 저도 3일 있다가 잠깐 집에 갔다 또 가고, 그걸 반복했었거든요.” (인뇌협 신영노 지회장) 박기연의 죽음은 박기연이 남긴 가장 묵직한 한마디 말이 되었고, 남은 사람들은 ‘이렇게 당신을 보낼 수 없다’는 외침으로 그의 말에 화답했다. 결집된 분노가 많은 것을 바꾸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희생을 밑거름 삼은 변화라는 사실 앞에서 마음 편히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또 한 사람의 박기연, 권오진 박기연의 죽음으로 활동지원서비스가 도입된 이후 인천에서는 2014년 11월부터 ‘하루 24시간 활동지원서비스 시범사업’이 실시된다. 마흔둘의 척수장애인 권오진은 이 시범서비스 사업의 첫 대상자 세 명 중 하나였다. 권오진은 스물여섯에 뺑소니 교통사고로 경추손상을 입고 목 아래로는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사고 후 여섯 해를 집에서 보내다가 2002년에 ‘꽃동네’에 입소했다. 난생처음 접하는 세상이 낯설고 힘들었지만 있을 만하다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점차 직원들의 인권침해가 심해져 갔다. 시정을 요구해도 바뀌는 게 없자, 탈시설을 결심했다. 2011년 민들레센터를 통해 체험홈에 들어간 권오진은 2014년 임대아파트를 얻어 혼자 생활하게 된다. 몸은 불편했지만 자유로웠다고, 권오진은 그때의 마음을 글로 적었다.3) 24시간 활동지원이 가능해지자 그의 자립생활은 꿈이 아닌 현실에 안착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희망찬 기대는 얼마 되지 않아 벽에 부딪혔다. 박근혜 정부는 2015년 9월 ‘지방자치단체 사회보장사업 정비 지침’을 내리고 정부와 지자체 복지사업 중 ‘유사·중복 사업’을 통폐합하도록 했다. 지침이 내려오고 5개월 뒤에, 24시간 활동지원이 끊겼다. 권오진의 건강에는 빠르게 적신호가 켜졌다. 욕창이 심각해진 그는 지난해 6월 17일 패혈증으로 사망한다. 권오진의 사망 후 터져 나온 장애단체들의 거센 분노의 목소리에 인천시는 지난해 말 부랴부랴 24시간 활동지원을 재개했다. 지난 6월, 활동지원시간이 줄어 사망한 고 권오진 씨 1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사진 허현덕 “420(장애인차별철폐의 날) 때 인천시와 간담회를 하면서 이분에 대해서 정말 이야기를 강하게 했거든요. 정말 위험한 상황이다, 그러니 올해 안으로 당장 재개해라. 그동안 장애인분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많이 사망했고, 특히 활동지원 시간이 부족해서 많이 사망했어요. 더구나 우리가 같이 생활하던 사람이 가니까 이게 너무 큰 상처로 오는 거예요.” 권오진의 자립 과정에 함께 한 민들레센터의 박길연 소장은 이 일로 활동도 그만두고 싶을 만큼 깊은 고통을 느꼈다. “못 견디겠더라고요. 살 수 있었는데 살지 못한 이유가 있고, 우리는 그걸 인지하고 있었는데 왜 끝까지 싸워내지 못했을까. 굉장히 죄책감이 들었어요. 당연한 지원이 누군가가 죽음으로 인해서만 가능하다는 게... 그랬을 때만 지자체와 정부가 조금 시늉을 하고 만다는 게... 너무나... 화가 나고. 이런 현실을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까가 활동가들의 과제인 거 같아요.” 지난해 인천 지역에서 실태조사로 파악된 24시간 활동지원 필요인원은 100명. 그러나 현재 이용가능인원은 10명에 불과하다. 인천시는 점차적으로 서비스 대상자를 늘리겠다고 약속했지만, 당장 서비스가 필요한 이들에게 하루는 1년보다 길다. 박기연의 사후 13년, 중증장애인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권리 찾기는 여전히 산적한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열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희생을 밑거름 삼아야 움직이는 이런 현실을 재확인하는 것에 그치는 것일까. 혹은 우리가 좀 더 나은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과 부채감을 되새기는 연례행사인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너무 잔혹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김광백의 기억 속에 남겨진 박기연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 * * 1)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 10년사 2)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 10년사 3) 장애등급제 ‘진짜’ 폐지 농성장에서, 1년 전 죽은 권오진을 추모하다, 허현덕 기자, 2019.6.18, 비마이너 ▷ ③부에서 계속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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