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②부 : 나의 싸움 우리는 왜 그를 기억하는가 “한번은 기연이 형이 리프트를 타는 과정에서 역무원이 반말을 했거든요. 그래서 막 싸우고 있는데 기연이 형이 그냥 가시는 거예요. 나는 너무 화가 났는데. 나중에 왜 그냥 가셨냐고 따졌거든요. 근데 싸워서 뭐 하냐고. 너는 싸우면 끝나는 사람이지만 자기는 계속 만나야 될 사람이라고. 나중에 도움받아야 될 때 불편함이 있으니까 아주 심하게 나를 모욕한 게 아니면 그 정도는 괜찮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역무원이 늦게 나오거나 불친절하면 생명에 지장을 주는 거잖아요.” 김광백은 박기연과 함께한 인천 장애인이동권연대 활동을 통해 장애운동을 시작했다. 학생운동을 했지만 장애운동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그가 알고 있던 운동의 문법과도 달랐지만, 무엇보다 그를 부끄럽게 했던 것은 자신이 장애인의 삶을 너무나 모른 채 운동을 하고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는 장애운동에 제대로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선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바꿀 힘을 손에 넣고 싶었다. “저는 기연이 형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면, 좀 오만했을 거 같아요. 기연이 형과 함께 살다가 나왔을 때, 자존감이 바닥을 찍었거든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지? 내가 운동을 한다고 스스로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얘기할 수 있을까? 그래서 저는 힘들 때 기연이 형 생각 많이 해요. 제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상황을 다시 만들면 안 되니까. 지금도 기연이 형에 대한 부채 의식이 크게 남아 있어요. 저는 기연이 형이 제게 숙제를 내준다고 생각하거든요. 해마다 6월이 되면 어떤 숙제를 내줬을까 고민해요. 현재 장애운동에서 가져야 할 고민이 뭘까를 생각하는 거죠.” 2006년 6월, 박기연 열사 장례 투쟁을 하며 인천시청 앞에서 천막농성을 하는 사람들. 사진 인천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어떤 이가 죽어서도 이곳에 머무른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가 우리 곁에서 살아간다고 말하려면, 우리는 삶이 무엇인가에 관해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삶은 관계를 통해 확인된다. 상호작용 속에서 서로가 쉼 없이 변화하고 있을 때, 우리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박기연은 김광백의 추억 속에 박제되어 있지 않고, 그의 현실 속에서 함께 변화한다. 박기연은 매년 다른 말을 김광백에게 걸어온다. 민들레센터 박길연 소장에게는 열사의 존재를 환기한다는 것이 지금 중증장애인의 존엄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 무엇이 더 필요한가라는 질문으로 다가온다. “박기연 열사님이 활동지원서비스의 제도화, 오직 이것만을 원했을까요. 아닐 거예요. 중증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통합해서 사회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때 그게 가장 먼저 필요했던 거지, 그거 하나만은 아니었을 거라는 거죠.” 사회운동은 차별과 억압이 사라진 상태를 지향한다. 그런데 그것은 쉽게 도달할 수 없을뿐더러, 차별이 사라진 사회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다시 말해, 해방은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써나가는 것이다. 인간다운 삶의 구체적인 권리목록을 채우고, 그것을 하나씩 실현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 관성에 익숙해지지 않고 잠시 멈추어 사유할 시간과 공간을 만드는 것. 그것이 열사를 기억한다는 것의 중요한 의미 하나가 아닐까. 그는 정말 말할 수 없었을까 박기연 열사를 기록하면서 가족을 만나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한편으로 가족을 만난다고 해서 그의 이야기를 좀 더 풍성하게 들을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기도 했다. 그를 한 인간으로 이해하고 평해주는 일은, 가족이라서 더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그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남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것은 불가능하기만 한 일이었을까. “북미와 유럽에서는 AAC(Augmentative and Alternative Communication)라고 불리는 ‘보완대체의사소통법’이 이미 30년 전부터 도입되었어요. 세 명의 전문가가 협업을 해서 그 사람에게 딱 맞는 의사소통중재법을 맞춰주는 거죠. 당신은 기계를 쓰세요. 당신은 그림카드를 쓰는 게 가장 좋을 거 같습니다. 그 수단을 이 사람이 완전히 이해하고 숙달할 때까지 알려주고 종료하는 거예요. 그 과정이 6개월에서 어떤 사람은 1년도 걸려요. 초반에는 전문가들이 개별적으로 활동하다 보니까 장애인들이 문을 두드릴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의사소통권리지원센터를 만들었어요. 방문해서 지도를 받는 곳도 있고, 온라인으로 신청하면 방문해 주는 곳도 있고. 우리나라는 이런 곳이 전혀 없는 거예요.” 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아래 한뇌협) 최명신 사무처장의 말에 따르면 한국의 중증 뇌병변 언어장애인들은 말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적절한 소통의 방법을 아직 찾지 못한 사람일 뿐이다. 한뇌협이 수년 전부터 중앙정부와 지자체를 상대로 뇌병변 언어장애인의 의사소통권리 보장 체계를 강력히 요구하는 이유다. “뇌성마비만 해도 장애유형이 2백 가지가 넘어요. 각기 다른 의사소통 방법이 나오죠. 몸짓이 안 되는 사람도 있어요. 몸짓조차 안 되어도 옆에 오래 있었던 사람은 알죠. 대개 부모님은 어릴 때부터 일상생활의 문제를 다 체크해오니까 알아요. 그런데 지역사회로 나오게 되면 이 사람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어요. 의사소통의 권리가 주어지지 않으면 과연 개별적 삶에 관한 접근이 가능할까요.” 캐나다의 경우 의사소통접근법을 모든 유형의 장애인들이 사회 환경에 접근할 수 있는 보편적 권리보장법 안에 넣어 연방정부 차원에서 발의해 통과를 앞두고 있다. 한국은 서울시에서 처음으로 2017년 12월 '장애인 의사소통 권리증진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2020년 의사소통증진센터를 건립하겠다고 올해 9월 대대적인 홍보까지 했으나 현재 예산을 전액 삭감한 상태다.1) “활동지원사가 한 사람의 의사소통 체계를 배우는데 보통 1년 이상 걸려요. 활동지원을 몇 달 하다가 관둬버리는 상황에서는 의사소통조력도 안 되는 거죠. 지역에 있는 복지관에 좋은 프로그램이 있어도, 참여할 수가 없죠. 의사소통 조력이 없이는 건강 문제를 소통할 방법도 없어요. 병원에 가보면 이 사람을 진단할 기계도 별로 없고, 의사들마저도 이 사람 의견을 듣지 않아요. 그러니 아프면 활동지원사들이 약국에 가서 약만 먹여버리는 정도에 그쳐요. 사회참여를 포함한 삶의 모든 행위들에서, 결국 이런 접근의 문제가 중요하죠.” 한뇌협은 뇌병변 언어장애인들에게 신체활동을 조력하는 활동지원사뿐만 아니라 의사소통을 전담하는 전문조력자가 별도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은 기존의 활동지원서비스 체계에서 ‘중복 지원’으로만 읽힐 뿐이다. 박기연 열사가 살았던 인천 차이나타운의 모습. 사진 박희정 더 나은 세상으로 올해 인천에서는 중증장애인의 모부성권 보장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진전이 이루어졌다. 인천시가 내년부터 지역에 거주하는 한 중증장애인 부부에게 하루에 12시간씩 육아지원서비스를 제공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5살 비장애인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이 부부는 모두 24시간 활동지원이 필요한 중증장애인이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시설에서 살다 민들레센터를 통해 탈시설하고 부부가 되었다. “아빠는 뇌병변장애인에 청각과 언어장애를 같이 가지고 있고, 아직까지 한글 수어를 다 깨우치지 못한 상태예요. 엄마는 뇌병변장애와 발달장애를 같이 가지고 있고, 척추측만으로 수술해서 양쪽에 쇠가 6개씩 12개가 들어가 있어요. 앉아 있는 거조차 어렵고, 혼자 식사하는 게 안 돼요. 장애인활동지원법에서는 아이가 만 6세까지만 엄마·아빠의 활동지원사님이 양육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요. 그런데 아이를 키운다고 해서 별도의 양육수당을 받는 건 아니에요. 만약 활동지원사가 만 6세 지나서 ‘이제 나는 아이 못 봐요’ 하면 이용자(장애인)는 권리로서의 서비스를 더는 받을 수 없는 거죠. 만약 아이를 봐준다고 해도 ‘내가 이거 원래 안 해주는 건데 해주는 거야’ 하면 활동지원사가 이용자와의 관계에서 ‘갑’이 되는 거예요.”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인천시청 점거농성에 들어가기 전, 이들 부부가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루에 2시간꼴로 제공되는 정부의 아이돌봄서비스밖에 없었다. 또한 부부가 모두 중증장애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한쪽은 기준 점수에 못 미쳐 최중증장애인 활동지원사에게 주는 가산수당(시간당 1000원)이 지급되지 않고 있었다. 양육에 대한 책임은 부부 두 사람에게 있는데 한쪽은 가산수당을 받고, 한쪽은 못 받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라도 해소하고자 민들레센터는 올해 센터 차원에서 다른 한쪽에도 가산수당을 지원해 양육수당을 대신했다. 그러나 중증장애부부의 모부성권을 활동지원서비스 안에서 풀어낼지, 별도의 양육서비스를 요구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남아있다. “제도가 마련되지 않으면 아이를 갖고 싶은 중증장애인들에게 결정의 기회마저 박탈될 수 있어요. 기존의 아이가 있는 사람들이 제대로 육아를 할 수도 없고요. 활동지원서비스는 정부가 예산에 맞춰서 주는 게 아니라 필요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지원을 해야 해요. 그걸 목표로 단계적인 계획을 가져가야 되는 거죠. 언제나 예산에 맞춰서 서비스를 받는 구조로 가면 계속 이런 상황은 생길 수밖에 없는 거예요.” 문제는 무엇을 얼마만큼 더 얻을 것이냐가 아니다. 장애인의 권리를 바라보는 시스템의 근본적 변화를 추동해내야 하는 것이다 인천장애인교육권연대 김광백 사무국장이 최근 가장 고민하고 있는 ‘박기연의 숙제’ 역시 이러한 문제다. “장애단체들끼리 모여서 의제를 가지고 좀 더 싸워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어요. 투쟁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기관들이 너무 바빠요. 사업하느라고. 자립생활센터들도 행정일 하느라고 바쁘고 체험홈 운영하느라고 바쁘고. 활동이 개별화되어 있는 거죠. 옛날엔 만나서 이념적으로 서로 싸워보기도 하고, 이런 거 해볼까 저런 거 해볼까 고민도 나누고, 피켓 같은 거 같이 만들면서 고충이 뭔지도 나누는데, 이제는 그런 걸 하기 힘들죠. 그때보다 단체들이 커졌지만 집회에 나오는 수를 보면 오히려 적어요. 열정도 떨어졌고. 저는 우리가 열사를 잊어버렸기도 했지만, 열사의 존재 이유도 잊어버렸다고 생각해요. 그 이유를 다시 찾아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박기연 열사를 기억한다면, 그때에 우리가 왜 모였을까를 다시 생각해보면 좋을 거 같아요. 2006년에 이분이 돌아가시고 우리가 모여서 고생하고 투쟁도 했어요. 조직도 만들었죠. 조직을 왜 만들었을까요. 뭔가 해보려고 만든 거잖아요. 지금보다 나아지도록.” 2006년 6월, 박기연 열사 장례 투쟁을 하며 열사가 돌아가신 간석역에서 인천시청까지 행진하는 사람들. 사진 인천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민들레센터 역시 사업이 많아지면서 활동가들이 실무에 파묻히는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주말도 연휴도 없이 일하느라 박길연 소장은 올해 9월 활동을 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되기도 했다.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다. 그러나 중요한 싸움이 있으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간다는 원칙만은 분명하다. “우리가 지금 만들어진 법제도만 가지고 적용해서 활동한다면 장애인들의 삶은 변화가 없을 거예요. 특히 중증장애인들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없어요. 스스로 활동가라고 했을 때는 지금 존재하는 이 법제도 안에서 활동하는 게 아니라,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사회 구성원으로 들어올 수 없게 하는 이 제도를 바꾸는 활동을 같이해야만 하는 거죠. 그게 단체를 만든 목적에 부합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요.” 박기연의 사후 13년째에 던져진 그의 숙제는 그간 장애운동이 일구어온 투쟁의 성과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많은 것들이 바뀌면서, 관성화되는 영역들도 늘어났다. 그럴 때 위기를 느끼고 가야 할 방향을 새롭게 탐지하는 예민한 촉수 역시 그 투쟁을 통해 벼리어진 것이리라. 열사의 삶을 환기한다는 것은 우리의 투쟁이 역사를 가졌음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쌓아온 투쟁이, 경험이 우리의 앞길을 비출 것임을 믿는 일이다. 그리고 상상을 멈추지 않는 일이다. 박기연이 지금 살아 있었다면, 그의 휠체어는 어느 곳을 향해 나아갔을까. 그가 망부석처럼 버티고 앉아 지키고자 했을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 * * 1) ‘뇌병변장애인 지원 마스터플랜’ 대대적으로 홍보해놓고 예산 반영 안 한 서울시, 강혜민 기자, 2019.10.8, 비마이너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