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수필 7부작 고향(故鄕)의 향수(鄕愁)를 찾아서 (셋) 그리움은 가슴마다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숱한 고뇌와 시련을 겪는 가운데 세상을 딛고 일어설 세 번의 기회가 온다고 한다. 그 와중에 반드시 치르고 지나가야 할 푸닥거리가 있다. 푸닥거리라 하여 무속인(巫俗人)들이 잡신들을 동원하여 치르는 푸닥거리가 아니라 한평생 인생길을 걸어가자면 불철주야(不撤晝夜)로 사람과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생존(生存)을 위해 부딪기며 절로 치르는 푸닥거리를 말한다. 또한, 어떠한 계기를 발판삼아 성공한 인생을 살아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거꾸로 성공할 기회가 제 발로 찾아와 주었는데도 인생 도약(跳躍)의 기회로 맞아들이지 못한 채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분명히 아름다운 추억의 향수(鄕愁)가 양념처럼 곁들여져 있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 평민으로 변복한 임금이 살기 힘겨운 시절 백성의 생활상을 미행(微行)하던 중 걸인(乞人)들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다리 위를 지나가다 무심코 다리 밑을 내려다보다가 생전 처음 색다른 광경을 접하다 보니 한참 동안 넋을 읽고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그 모습은 가진 거라고는 별로 없는 걸인 부부가 거적(巨跡)으로 겨우 가린 움막 속에서 옹기종기 둘러앉은 자식들을 내려다보며 얼굴에 화색(和色)이 피어 떠나질 않더라는 것인데 임금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마음만 먹으면 가지지 못할 것이 별로 없는데도 하루를 살면서 온 마음 풀어놓고 호탕하게 웃을 일이 오뉴월 가뭄에 소나기와 같은데 저들은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이 훨씬 더 많을 텐데 온 마음 다 풀어놓고 저리 웃을 수 있다니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임금은 궁금증을 풀기 위해 신분을 숨긴 채 걸인 부부와 아이들이 있는 움막으로 다가섰다. 움막 앞으로 몇 걸음 다가서니 갖은 악취가 움막 안에서 풍겨 나왔다. 코를 자극하는 악취를 갖갖으로 참아 넘기며 움막 안으로 들어선 임금이 걸인 부부에게 물었다. “다들 살기 힘겹다고 난리인데 댁들은 무엇이 그리 좋아 얼굴에서 화색이 떠나질 않는 것이오?” “예! 저희는 지금 삶의 향수를 만드는 중입니다.” “삶의 향수? 그 삶의 향수라는 것은 어떻게 만드는 것이오?” “뉘신 지 모르지만, 댁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구려” “아니, 댁은 나를 처음 만났는데 그걸 어떻게 아시오?” “아무리 신분이 귀하고 천하를 다 얻을 수 있다 하여도 얼굴에서 웃음의 씨앗이 움트지 않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지요. 그리고 그런 사람은 삶의 향수를 만들어 낼 수 없고요” “그렇다면 내 얼굴에 웃음의 씨앗뿐만 아니라 삶의 향수를 느낄 수 없단 말이요?” “죄송한 말이지만 댁의 모습에선 웃음을 찾아볼 수가 없답니다.” “무슨 말이요? 나는 지금도 웃고 있질 않소” “내 말은 겉웃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속웃음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댁은 속웃음이 아니라 겉웃음을 웃고 있는 것이고요” “그렇다면 그 속웃음을 웃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오? 그 방법을 내게도 가리켜줄 수 있소?” “바로 그 점이오” “그 점이라니요?” “댁과 내가 잠깐 얘길 나누는 동안 댁은 줄 곳 내게 질문만 하지 않았소” “그건 그렇소만…” “?표로 질문만 하는 사람은 웃음의 씨앗을 움트게 할 수도 삶의 향수도 지어낼 수 없는 법이지요. 이 세상엔 의문투성이이므로 그 의문점을 애써 밝혀내려 하지 말고 주어진 것에 늘 감사하다 보면 얼굴엔 늘 웃음의 씨앗이 절로 움트고 그 속에서 사람이 사는 향수를 지어낼 수가 있지요.” 바로 이러한 공정(工程)이 삶의 향수를 만들어 내는 공정이다. 천금을 다 주고도 살 수 없는 삶의 언덕에서 세상 소풍 나올 적에 가져온 삶의 향수조차 뿌려보지 못한 이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 표현해도 전혀 무리는 아닐 것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무척이나 짧은 세상 소풍 길에서 발자국 찍어낼 눈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걷다 보면 장마철 진탕 길을 걸을 때도 있고 오뉴월 뙤약볕 가뭄에 흙먼지 폴폴 나는 길을 걸을 때도 있으나 죄다 즐겨 걸어야 할 길일 터. 어린 나이에 당돌하게도 언어의 마술사 문학 작가의 길을 가고자 했던 내게 스승이 되어주고 평소 일상생활 속에서 삶의 향수를 짙게 풍겨주었던 이들은 가족들이었다. 현재도 그렇지만, 내 글의 소재도 모델도 죄다 가족들이었다. 자전적(自傳的) 글을 즐겨 써온 내겐 가족들 삶의 향수가 때로는 보약이 되었고 또 때로는 채찍이 되어 나태해진 나 자신을 엄하게 나무라곤 했었다. 오늘날 내가 있기까지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가족사의 그 향수를 찾아 떠나는 세 번째 길에서 만난 모습들은 어떤 향기와 어떤 색깔을 전해 주는지…
피할 길 없는 애꿎은 운명 앞에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던 나의 인생길에 동반자이자 유일한 위로자는 순간순간 일상생활 속에서 풍겨 나오는 삶의 향수였다. 그 향수의 향기가 아카시아향 짙은 향인지 가시가 돋친 장밋빛 향인지 나는 정녕 모른다. 다만, 가슴 사무치게 그리울 뿐이다. 그 그리움의 향수를 찾아가는 첫 번째 향기를 접해볼 시절은 내 나이 열 살 때의 이야기다. 그 시절 아이들은 장난감 홍수시대에 사는 요즈음 아이들과 달리 가지고 놀 장난감이 턱없이 부족했단 표현보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 기회가 거의 없었다. 라는 표현이 정확한 표현일 게다. 세상 모든 동, 식물을 준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해 가듯이 그 시절 아이들도 처한 환경에 잘도 적응하며 잘도 뛰어놀았다. 그 시절 아이들은 귀한 장난감을 탓하기 전에 가지고 놀 거리를 손수 조달해서 놀았다. 고달팠던 시대에 태어나 박봉으로 한 가정의 가장 노릇을 하기엔 당면한 현실이 너무 벅찼던 가장들은 일과 후 마음이 통하는 술벗끼리 삼삼오오(三三五五) 소주잔을 기울이며 인생과 시대를 논했고 아이들은 마시고 버린 소주병이나 누군가 마시고 버린 사이다병 뚜껑을 주워 모아 큰 돌멩이로 평평하고 납작하게 펴서 따먹기를 하였는데 하루는 지난밤 아버지 직장 동료가 다녀가신 뒤라 소주병 열 개 정도를 소득으로 얻게 된 형님과 나는 아버지 연장 쾌에서 망치를 꺼내 손쉽게 손질한 다음 동네 악동들과 병뚜껑 따먹기를 시작했었다. 때마침 그날이 현충일이라 공휴일이었던 덕에 오전 이른 시간부터 시작한 병뚜껑 따먹기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점심밥 먹는 것도 잊은 채 병뚜껑 따먹기에 정신이 팔려있던 형제는 해가 서산에 걸렸을 무렵에서야 호랑이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차 싶어 형제가 합심하여 따 모은 병뚜껑을 휠체어에 앉은 나의 무릎에 얹어 형님이 휠체어 미는 능숙한 솜씨로 집을 향해 다름질 쳤는데 불호령이 떨어져도 성에 차지 않을 어머니 입에서 우리 두 형제를 보시자마자 깔깔 되며 웃으시는 것이 아닌가 어리둥절해하는 형제에게 “아이고! 이놈의 손들아! 문디같은 병 따가 리가 밥보다 좋더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제 너거 꼬라지 좀 봐라. 까마귀가 보머 새이야! 하겠데이 민경 함 보고 씻든지 말든지 하래이”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온 형제는 번갈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 동시에 웃음보를 터뜨렸다. 진종일 밖에서 얼마나 많은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온통 비포장 골목에서 뒹굴던 병뚜껑을 만지작거리다 코도 닦고 얼굴이 가려우면 얼굴도 긁었던 나머지 형제의 모습은 하나같이 방금 아프리카에서 가출한 아이들 같았다. 용서해 주신 듯싶으나 행여 불똥이 튈까 싶어 어머니 눈치를 살피며 저녁 식사 시간까지 각자 할 일을 찾아 착실하게 다 해놓았다. 아버지께서 퇴근하시자 저녁 밥상머리에서 오후에 있었던 일을 어머니께서 아버지께 죄다 말씀드리자 여느 아버지들 같았으면 심한 꾸지람을 하셨을 텐데 꾸지람은커녕 “너거 실데없는 병따꿍이 그래 좋나? 그라머 내일 아부지가 억수로 갖다 주꾸마” “하이고 보소! 그거 갖다 줘봐야 집안만 어지럽심더 마 치이소” 어머니의 말류에도 아버지께선 며칠 후 퇴근길에 갖가지 병뚜껑을 한보 자기나 갖다 주신 것이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 아버지 친구분 중에 식당을 경영하는 분이 계셨는데 그 아저씨께 부탁하여 가게에서 나오는 병뚜껑을 모아다 주신 것이었다. 그 덕에 한동안 병뚜껑 부자로 지냈고 동네 개구쟁이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었다. 이제는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수 없고 만나보려 해도 만나볼 수 없는 이러한 향수들이 못내 그리워 가슴에 머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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