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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안군 증도를 떠나 목포로 향하는 길에 청계삼거리를 통과 중인 일행들. 이정표에 나타난 1번국도는 목포에서 신의주를 연결하는 대한민국 제1호 국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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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여기는 전남 신안군 증도 우전해변이다. 우리는 해변 잔디밭에서 침낭을 뒤집어쓰고 각자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전쟁 상대는 바다 모기. 해변지역에 서식하는 바다 모기는 내륙의 동료들보다 공격적이고 셔츠나 바지 따위쯤은 쉽게 뚫고 주둥이를 박아 넣는 모진 놈들이다.
놈들은 침낭 밖으로 노출된 얼굴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공습 예고와도 같은 앵~ 하는 비행음이 멈추는가 싶으면 여지없이 따끔한 통증이 이어진다.
집단가출 자전거 전국일주 제10차 투어를 위해 전날 저녁 9시에 서울을 떠나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함평, 무안을 거쳐 무려 7시간의 운전 끝에 비박지에 도착한 우리는 날이 새면 시작될 빡센 라이딩에 대비해 1초라도 빨리 잠들고 싶었으나 모기들 입장에서는 우리의 도착이 혈액 파티의 시작이었다.
침낭 커버의 지퍼를 완전히 닫으면 덥고 숨쉬기도 불편했지만 이마와 귀를 몇 방 물리고 나서는 어쩔 수 없이 지퍼를 올리고 말았다. 모기를 한 마리도 척살하지 못하고 오로지 당하기만 하니, 이쯤 되면 전쟁이라기보다는 농성(籠城)에 가깝다. 지난해 9월 강화도에서 첫 전국일주 페달링을 시작한 이래 가을, 겨울, 봄을 지나 이제 본격적인 여름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모기들은 무자비하고도 극성스런 방법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슬로시티 증도와 한국 최대 염전
밤새 모기와 싸우느라 잠을 설쳐 입이 깔깔했으나 자전거를 타려면 입맛이 없어도 밥을 먹어둬야 한다. 신안에서 염전을 경영하고 있는 청년 소금농사꾼 김성종씨의 안내를 받아 증도면사무소 부근의 안성식당을 찾았다. 메뉴는 요즘 한창 제철인 병어조림. 보통 비린 음식은 아침 식사로 적당하지 않다고 막연하게 가졌던 선입견은 호박과 감자, 양파를 깔고 그 위에 병어를 올린 뒤 고춧가루와 마늘로 만든 양념간장을 자작하게 부어 끓인 병어조림 앞에서 깨졌다. 잠이 모자라 입맛이 없는 와중에서도 모두들 그릇을 깨끗이 비워 낸다.
신안군 증도는 슬로시티국제연맹이 지정한 대한민국 공식 슬로시티(Slow City)다. 슬로시티운동은 1999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국제적 NGO 활동. 운동의 공식 명칭은 치타슬로(Cittaslow)로 슬로시티국제연맹은 인구 5만 이하의 도시 중 자연생태계, 주민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 등을 기준으로 슬로시티를 지정하는데 선정 조건 중에는 유기농법에 의한 지역 특산물이 있어야 하며 대형 마트나 패스트푸드점이 없어야 한다는 것도 있다.
현재 약 20개 국에 120여 개의 슬로시티가 지정되어 있으며 4년마다 재심을 받아 타이틀 유지 여부를 결정하는데 국내에는 신안군을 포함, 전남 담양, 장흥, 완도군 등 호남 4군이 선정된 후 재작년 경남 하동군이 대열에 합류, 총 5개의 슬로시티가 있다.
관광대국임을 자처하는 일본은 농촌이 지나치게 현대화·서구화돼 있는 탓에 수차례의 도전에도 고배를 마셨고, 중국도 아직까지 슬로시티가 한 곳도 없는 가운데 최근 60개 도시를 ‘만성(晩城)’으로 지정해 슬로시티 가입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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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특한 염전 풍경의 한축을 이루고 있는 소금 창고 앞에서 잠시 라이딩을 쉬고 있는 집단가출 전국일주팀. 목재로 만들어진 소금창고는 염분 덕분에 잘 썩지 않아 오랜 세월을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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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신안군이 슬로시티가 된 것은 세계 최고품질의 천일염의 집산지, 증도 덕분이다. 특히 증도의 태평염전은 국내 최대 규모 염전이자, 그 자체로 문화재.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얻어내는 지난한 소금작업 자체가 신안 슬로시티의 상징인 것이다.
그동안 해안코스를 1,500km 가까이 달려오며 곳곳에서 염전을 만났지만 신안의 염전은 규모면에서 단연 국내 최고다. 마치 모내기하기 전의 논처럼 보이는 소금밭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고 소금밭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소금창고가 장관이다. 특히 증도와 사옥도는 사방 눈길 닿는 곳 어디나 염전이었고 우리의 자전거 행렬은 염전을 따라 이어졌다.
신안 소금의 품질은 세계적으로 톱클래스인데 그 비밀은 신안 청정해역의 깨끗한 바닷물과 갯벌에 함유된 풍부한 무기질이다. 증도, 사옥도, 지도 3개 섬을 이어 무안으로 이어지는 섬길은 길고 길어서 평균 시속 15km의 자전거는 해가 높이 뜰 때까지도 섬을 벗어나지 못했다.
양파 수확하는 게 자전거 타기보다 더 힘들어
마지막 섬 지도에서는 마침 읍사무소 부근에 선 5일장을 만났다. 왁자지껄 시장 골목으로 들어서자 고소한 냄새가 침샘을 자극하며 발길을 붙잡는다. 노점 튀김집에서 퍼져 나오는 튀김 냄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전거를 눕혀두고 달려가 앞다퉈 오징어튀김과 찹쌀도너츠를 집어먹는데 이제 막 기름솥에서 건져 올린 바삭하고 부드러운 튀김 맛은 아침 일찍부터 20여km를 쉼 없이 달리느라 출출해진 입에 착착 감긴다.
“오늘 목포까지 가야 하는데 빠르면서도 차가 덜 다니는 한적한 길이 어딜까요?”
사실 빠른 길과 한적한 길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모순관계라는 점을 잘 알지만 일단 사람을 만나면 길부터 물어보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는지라 오징어 튀김을 씹으며 튀김집 아저씨한테 물어봤다.
“워메, 목포라? 자전거로는 징하게 먼디. 현경에서 무조건 우회전하씨요. 그래가꼬 망운에서 무안공항 옆으로 해서 청계를 지나서 쪼~옥 가면 거그가 목포요.”
아이패드 위성지도를 놓고 설명을 듣자 나아갈 길이 명확해진다. 튀김집 아저씨가 가르쳐준 길은 위험한 고속화도로를 타지 않고도 목포까지 최단거리로 갈 수 있는 국도와 마을 뒷길을 절묘하게 이은 코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