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자료 모음방/애송 동시

제 18 편 나무 속의 자동차 - 봄에서 겨울까지2

松竹/김철이 2011. 5. 13. 00:10

제 18 편 나무 속의 자동차 - 봄에서 겨울까지2

 

오 규 원
물을 기다리는 가지와 잎… 나무는 '작은 우주'
신수정·문학평론가

 

 

뿌리에서 나뭇잎까지

밤낮없이 물을

공급하는

나무

나무 속의

작고작은

식수 공급차들



뿌리 끝에서 지하수를 퍼 올려

물탱크 가득 채우고

뿌리로 줄기로

마지막 잎까지

꼬리를 물고 달리고 있는

나무 속의

그 작고작은

식수 공급차들



그 작은 차 한 대의

물탱크 속에는

몇 방울의 물

몇 방울의 물이

실려 있을까

실려서 출렁거리며

가고 있을까



그 작은 식수 공급차를

기다리며

가지와 잎들이 들고 있는

물통은 또 얼마만할까

▲ 일러스트=윤종대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 본다" 생전에도 폐기종으로 고통받았던 한 시인은 오랫동안 공기 좋은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서후리의 주민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2007년 2월 향년 66세로 마침내 강화도 전등사의 한 나무 아래 영원히 잠들었다. 그 나무는 지금 '오규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시인은 나무가 되었다.

그러려고 그랬을까. 그의 시에서 나무는 그 자체로 언제나 하나의 우주다. 그는 나무가 뿜어내는 삶의 에너지를 감지하고 그 세계의 이치에 귀를 기울인다. 그 순간 그는 본다. 나무를 구성하는 작은 입자들의 앙증맞은 움직임을. 이 '식수 공급차'는 뿌리에서 나뭇잎까지 밤낮없이 물을 싣고 달린다. 나무 속의 이 '작고작은' 자동차들을 상상하는 시인은 기어이 그 자동차의 물탱크 속에 실려 있을 '몇 방울의 물'들까지 들여다보고야 만다. 그리고 마침내 그 물을 기다리는 가지와 잎들의 '물통'을 상상하며 이 미시적인 우주를 완성한다.

이런 종류의 상상력은 오랫동안 홀로 아파 본 사람의 것이다. 병 때문에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지 못한 채 하루 종일 나무와 풀, 이름 모를 새, 흘러가는 구름 등을 벗 삼아 자연 속에서 그것과 하나가 되어 살 수밖에 없는 자는 이 밋밋한 일상 속에 작은 우주를 구축한다. "산에서 시를 쓰면/ 시에서 나는 산 냄새// 소나무, 떡갈나무, 오리나무의 냄새/ 산비둘기, 꿩, 너구리, 오소리의 냄새// 산에서 시를 쓰면/ 시에 적힌 말과 말 사이에/ 어느새 끼어 있는 그런 산 냄새"(〈산〉). 이 산 냄새가 왠지 모를 고독을 동반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원래 그가 동시집을 묶어낼 계획은 훨씬 훗날의 것이었던 듯하다. 1995년 시인은 그간 써왔던 동시들을 묶어내면서 '10년 후에도 맑은 정신으로 이 동시들을 대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어 그렇게 한다고 덧붙였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그의 예감은 적중한 듯하다. 이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쉽다고 해야 하나? 시인은 가고 시만 남았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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