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자료 모음방/애송 동시

제 17 편 산 너머 저쪽

松竹/김철이 2011. 5. 5. 11:08

제 17 편 산 너머 저쪽

 

이 문 구
장석주·시인

 

산 너머 저쪽엔

별똥이 많겠지

밤마다 서너 개씩

떨어졌으니.

산 너머 저쪽엔

바다가 있겠지

여름내 은하수가

흘러갔으니.


(1988)

▲ 일러스트 양혜원

이문구(1941~2003)는 본디 소설가다. 호는 명천(鳴川)이다. 오래 묵은 농경유림(農耕儒林)의 삶과 해체 위기에 놓인 농촌 현실을 걸쭉한 충청도 토박이말로 풀어낸 《관촌수필》과 《우리 동네》 연작소설을 읽으며 감동에 젖었던 시절이 떠오른다. "한국놈덜은 지겟다리 자손두 동네 이장만 되면 금방내 관청 편이 된다는 거"와 같은 충청도 사투리에 담긴 풍자는 통렬하다. 위암으로 투병하다가 62세로 세상을 뜨며, "한 세상 고맙게 잘 살다 여한 없이 가니 내 죽거든 화장해 뿌려 아무 흔적 남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쓰다 남은 몸에서 나온 골분(骨粉)은 고향인 보령의 산하에 뿌려지고, 뜻대로 무덤도 없고 문학비도 세우지 않았다.

아이는 "산 너머 저쪽"으로 떨어지는 별똥을 봤다. 별똥은 "산 너머 저쪽"으로만 떨어졌으니, 거기에 별똥이 많이 있겠거니, 상상하는 건 당연하다. 아이는 "산 너머 저쪽"으로 여름내 흘러가는 은하수를 보았으니, 거기에 바다가 하나 생겼거니, 상상하는 건 당연하겠다. '저쪽'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길에는 얼마간 그리움이 섞여 있다.

'이쪽'이 현재라면 '저쪽'은 영원히 오지 않는 현재다. '이쪽'은 가난, 질병, 지진, 유혈분쟁 따위로 얼룩져 있다. 한숨과 눈물과 비통한 울부짖음이 그칠 날이 없다. '저쪽'은 인종이나 민족 간의 분쟁이나 폭동, 왕따나 디아스포라가 없다. 한 경전을 인용하면, 모든 땅 위의 야포(野砲)들을 녹여 농기구를 만들고, 사슴이 늑대와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어린아이와 함께 노니는 곳이다. 광우병이나 죽음도 없고, 지진이나 교통사고 따위도 일어나지 않는 곳이다. 고달플 때 우리는 '저쪽'을 바라보고 꿈꾸며 그 고달픔을 견뎌냈다.

이문구는 《개구쟁이 산복이》라는 단 한 권의 동시집을 펴냈다. 〈산 너머 저쪽〉은 그 중의 한 편이다. 우리는 삶을 견디고 살아내기 위해 없는 '저쪽'을 발명하고 현실의 어딘가에 그 자리를 만들었다. '이쪽'의 수고와 고달픔이 '저쪽'이 있어야 할 당위를 이룬다. 있음과 있어야 함 사이의 간격이 커질수록 삶은 거칠고 고달파진다. 삶이 누추하고 비참할수록 살아보지 못한 '저쪽'은 언젠가 가야 할 그리움의 자리, 즉 극락정토, 무릉도원, 엘도라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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