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 속에 삶이란 사람을 게으르게 하고 나태하게 하는 법인데, 한 사람의 인생은 한 편의 긴소설이라 했던가. 혜정은 자신의 주위에서 맴돌고 있는 자신과 준호에 관한 수많은 억척과 헛된 소문들을 한 귀로 듣고 또 다른 한 귀로 흘려버리는 지혜를 발휘하는 한편, 주위의 모든 이들도 언젠가는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리라는 믿음으로 사랑의 집 장애인 가족들에게 더욱 깊은 사랑과 정성을 쏟았다. 비록 양가의 부모님, 형제, 자매들을 비롯한 일가친척들의 축복과 격려와 박수는 없을지라도 사랑의 집 가족들의 진심 어린 축복과 박수를 받으며 준호와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혜정은 결혼식에서 사랑의 집 가족들에게 결코 눈물만은 보이지 않으리라 다짐하지만 사랑의 집 장애인들의 일그러진 모습 속에서 우러나오는 참상의 축하와 박수를 받으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감정은 복받쳐 달아올랐고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은 볼을 타고 한없이 흘러내렸다. 정식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몇 달 후 금쪽같은 아들을 출산한다. 이미 임신 후부터 꼬리에 꼬리를 물어오던 억척과 헛소문들이 더욱 극성을 부리기 시작하여 끝내는 준호와 사랑의 집 가족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자신의 분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사실에 어린 아이처럼 마냥 기뻐하던 준호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혀주고 말았다. 준호와 혜정은 이 서글픈 현실과 냉혹하기 그지없는 이 사회가 정말 싫었으나 아기가 태어날 몇 달 동안 서로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며 서로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특히, 준호는 정말 이 세상에선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던 자신이기에 자신의 분신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믿을 수가 없었다.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 지었고 한동안 두 사람은 요한의 해맑은 웃음과 재롱에 시간 가는 줄 몰랐으며 혜정은 여전히 일곱 명의 사랑의 집 장애인 가족의 대모 역할을 충실히 다하였다.
그러던 어느 해 봄, 사랑의 집 가족들을 남다른 애정의 눈으로 지켜보며 많은 물질적 도움을 주었던 한 후원회원의 극진한 사랑으로 경기도 평택 인근 마을에 아담한 집을 마련하여 이사를 하게 되어 기쁨은 한층 더했다. 낡고 허름하긴 하여도 정상적으로 지어진 집으로 이사를 한 준호와 혜정을 비롯해서 사랑의 집 모든 가족들은 이제야말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새 보금자리로 이사도 하였고 가족들도 하나 둘씩 늘어나 사랑의 집 가족은 이제 모두 열 명으로 불어났다. 경기도와 천주교 서울 대교구로부터 정식 장애인 복지 시설로 인가를 받은 사랑의 집에 관한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져나가 경기도 일대와 서울 인근에까지 퍼져 나가게 되었으며 소문을 듣고 찾아온 봉사자와 방문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사랑의 집을 찾아주는 방문객들이 많이 불어날수록 사랑의 집 가정 경제적 사정도 조금씩 나아져 갔고 기쁨과 환희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즈음,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사랑의 집 가족들이 한 가족이 된 이후 처음으로 전 가족이 서울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서울 나들이를 앞둔 전날 밤, 가족들은 마치 첫 소풍을 앞둔 어린 아이처럼 꿈에 부풀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꼬박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그도 그럴 것이 선천적, 후천적으로 장애인이라는 족쇄에 묶여 번번이 바깥 구경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암흙 속에 갇혀 긴긴 세월을 한숨과 통한의 눈물을 남몰래 삼켜야만 했으니 말이다.
밤을 지새운 탓으로 무거운 눈으로 새 아침을 맞이하지만 가족들의 설레는 마음은 아랑곳없이 하루의 아침은 움 터왔고 도시락과 음료수 등을 준비한 가족들은 독지가가 준비해 온 17인승 봉고차에 남녀 봉사자 몇 사람과 함께 타고 아침 일찍 난생처음 서울 구경에 올랐다. 창경궁, 보신각종, 남대문 등을 거쳐 서울 시내 이곳저곳을 두루 구경하다 동심으로 돌아가 서울 어린이 대공원에서 점심를 하기로 하고 남녀 봉사자들의 도움으로 봉고차에서 내렸다. 많은 놀이 기구도 구경하고 봉사자들과 함께 실 체험도 해보곤 하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식사를 하기 위해 공원 한 쪽에 준비해온 돗자리를 펴고 도시락과 음료수 들을 꺼내어 펼쳐놓고는 가족들이 막 감사의 기도를 바치려 할 때 말쑥하게 차려입은 한 쌍의 남녀가 옆을 지나가다, 가슴속에 치유될 수 없는 불치의 상처를 입히는 말을 내뱉는 것이었다.
-와! 우리나라 많이 살기 좋아졌는데? 옛날 같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지. 어디 장애인들이 밖에를 나와 다녀. 그렇지 않아도 땅이 좁은데
-여보세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말씀을 가려서 하시죠
-아니, 넌 또 뭐야!
-너라뇨? 아니, 이분이 정말
-야! 내가 무슨 말 잘못했느냐? 이 자식이, 너도 병신이냐!
-이 사람이 정말 두고 보자 하니 못하는 말이 없네. 병신이라니?
아니, 여보세요! 세상에 장애인이 되고 싶어 장애인이 된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당신이나 나 역시도 언제 어느 때 어떻게 장애인이 될지 모르는 것 아니오!
-아니, 이놈의 자식이 듣자 듣자하니 못하는 말이 없네.
-뭣! 이놈의 자식?
-그래, ‘이놈의 자식’내가 뭐 말을 잘못했느냐!
-이 나쁜 사람 이리와, 오늘 당신의 그 나쁜 버릇을 고쳐주지.
-그래, 여기 왔다! 내 버릇을 어떻게 고칠래? 한번 고쳐봐 구경 좀 하자!
사랑의 집 일행의 옆을 지나가던 행인의 생각 없이 내뱉은 몇 마디 말에 혈기 왕성한 청년 봉사자들이 들고 일어나 멱살잡이를 하고 온갖 욕설과 막말들이 오고 가며 주위는 금새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이에 놀란 사랑의 집 장애인 가족들은 겁에 질려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와들와들 떨고는 안절부절 어떻게 할 바를 몰랐으며 결국, 주위에서 경찰에 신고를 하여 경찰의 개입으로 주위는 다시 평온을 찾았지만, 사랑의 집 장애인 가족들의 마음속에 다시 한 번 큰 상처를 주고 말았다. 마치 소풍가는 날을 앞두고 전날 밤 설레는 마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또 다른 바깥세상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으로 하루해가 동터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그 부푼 꿈은 물거품이 되어 어디론지 사라지고 바깥세상에 대한 아쉬움과 실망, 그리고 두려움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봉고차 안에서도 가족들 사이에도 말 한마디가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로는 장애인 가족들은 밖으로 나들이 나갈 기회가 있어도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다. 눈을 뜨고 눈을 감는 순간까지 함께 생활하며 수발을 들어주어야 하는 혜정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더욱 심한 피로를 느껴야 했으며 곁에서 이를 묵묵히 바라보는 준호의 심정은 더욱 시리고 아팠다. 기쁨과 슬픔의 수레바퀴는 사랑의 집 가족들의 가슴 시린 애환들을 뒤로하고 세월의 물고를 터서 흘려보냈고 준호와 혜정이 사랑의 집이라는 이름아래 장애인 공동체를 이룬지도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그동안 수많은 삶의 곡절들이 혜정의 인생 오선지위에 많은 노래를 지어 내렸겠지만, 혜정 역시 한 인간이었기에 혼자서 준호를 포함한 일곱 명을 돌보기란 무척 힘겨웠으나 정작 누구 하나 숙식을 함께하며 조그마한 일손이라도 들어주는 이가 단 한사람도 없었다. 하늘이 그런 혜정을 가엾게 여기셨던지, 함께 숙식을 같이하며 혜정의 일손을 들어줄 이가 나타난 것이다. 1년이란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혼자 몸으로 일곱 명의 중증 장애인을 돌보기란 몹시 힘에 겨운 일이었지만,
그다지 힘들다는 생각은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준호를 제외한 여섯 명의 중증 장애인의 뒷바라지를 하다 보니 정작 한 남편의 아내로서 준호에게 본의는 아니지만 조금 소홀했던 것이 늘 혜정의 가슴 한 쪽에 아련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루는 아침식사 준비로 혼자 분주히 집 안팎을 오가고 있을 때, 조금은 부유하게 느껴질 만큼 옷차림이 말쑥한 한 노인이중절모를 벗어들고는 혜정의 눈앞에 머리를 조아렸고 혜정도 얼떨결에 생면부지의 노인 앞에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노인이 안방으로 들어와 준호와 첫 인사를 나눈 다음, 노인에게 삼 남매 중 막내아들이 정신적으로 조금 모자라는 장애인이라며 자신의 막내아들은 비록 정신적인 장애가 있어 계산적이고 똑똑하지는 못하여도 손과 발이 성하니 작은 심부름이나 간단한 일손은 들어줄 수 있음에 사랑의 집 가족의 한 일원으로서 숙식을 함께할 수 있게 해 주십사 하는 간곡한 부탁과 함께 내어놓는 가정사 이야기가 무척 마음 아팠다.
노인은 젊은 시절 사업을 했었고 사업이 뜻대로 잘되는 덕분에 제물도 많이 모았는데 제물이 많다 보니 눈을 딴 곳으로 돌려 외도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헛된 삶 속에서 희생 제물로 태어난 이가 자신의 막내아들이라는 것인데, 영민이라는 이름을 지닌 막내아들의 생모는 영민을 낳은 지 채 하루도 못 되어 입에 젖 한 번 물려보지 못한 채 산후 부작용으로 그만 저 세상으로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영민은 노인의 본처이자 영민의 큰어머니 품안에서 친자식 못지않게 큰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으며 성장 후에도 삼 남매 중 누구보다 부모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3년 전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큰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지게 되었고 형님 댁에서 아버지인 노인과 함께 지내왔단다. 세상인심이 각박해 지고 삭막해 질수록 부모님을 생각하는 공경심도 떨어지고 형제간의 우애도 떨어져서 마음 편히 지낼 수가 없고 영민이 형님과 형수의 눈치를 보며 사는 듯하여 노인이 살아생전 재산을 꼭 같이 분배하여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고 영민의 몫으로 자그마한 장애인 복지 재단을 만들어 유능한 관리자를 찾아 운영케 하며 영민은 몇 년간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지내게 하여 눈을 뜨게 한 다음 관리자와 함께 복지재단을 관리하게 하고 싶어 영민을 사랑의 집으로 데려왔으니 당분간 사랑의 집 가족으로 지내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노인은 당장 자신의 입장이 어쩔 수 없고 자신이 아쉬워 준호와 혜정을 찾아왔지만, 준호와 혜정의 입장에서는 더 없이 좋은 일이 아닐 수 없고 구세주를 만난 듯 반가운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혜정은 그동안 준호를 포함하여 여덟 명의 사랑의 집 1급 장애인을 혼자의 힘으로 극진히 보살펴 오면서 가슴 한 쪽에 늘 한 가지 아쉬움을 묻고 살아야 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여자 혼자의 몸으로 여덟 명의 1급 장애인을 돌보기에는 턱없이 일손도 달렸고 사랑의 집이 경기도와 천주교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게 되자 많은 사회 저명인사를 비롯한 교회의 주요 관계자들이 수시로 찾아와도 혜정은 가족들을 보살펴야 하기에 외부의 손님들 접대할 시간이 없어 준호에게 손님들 만나 접대하라고 했지만 몸이 부자유스러운 준호가 손님을 접대할 시에 누군가가 곁에서 손과 발이 되어주어야 했다. 사랑의 집에서 손과 발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혜정, 한 사람뿐인데 접대할 때마다 준호의 손과 발이 되어주기 위해 자리를 비우고 사랑의 가족들의 뒷바라지를 뒤로한다면 사랑의 집 안팎은 물론 가족들의 식사 준비마저도 걱정을 해야 할 형편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중에 영민이 찾아온 것이기에 혜정에게는 구세주가 찾아오신 격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영민은 사랑의 집 가족 중 한 일원이 되었고 준호의 손과 발이 되어 시중을 들었으며 준호가 볼 일이 있을 시에는 반드시 준호를 동행해야 하는 수행비서 노릇을 톡톡히 해냈었다. 영민의 나이는 그때 당시 스물일곱, 현재 나이는 서른다섯 살이지만 생각을 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지능지수는 불과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와 같다. 영민이 사랑의 집 가족의 일원이 된 이후로 혜정은 힘겨운 일상생활에서 시간적인 여유가 조금 생겼고 그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하여 다른 식구들에게 더 많은 신경을 쏟기로 하였다. 이제 사랑의 집 가족들의 소망은 정상적인 지붕을 지닌 집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겉에서 본 사랑의 내부는 아주 평온하고 조용한듯하였으나 장애인들도 어쩔 수 없이 감정을 지닌 인간이기에 가족들 사이에도 눈에 잘 띄지 않는 내분의 꽃씨가 움트기 시작했다.
사랑의 집 장애인 가족들 사이에 피기 시작한 불행의 작은 불씨는 아주 작은 불신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아무리 세상살이에 병들고 지쳐 삶의 의욕과 의미조차 포기해 버린 장애인이라 할지라도 한 인간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이런 부분에서는 사랑의 집 장애인 가족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고 그 악마의 제물이 되어 놀아나는 사람은, 준호와 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 부부를 시기한 일부 장애인 가족들이 순박하기 그지없는 다수의 가족의 귀속에 넣어준 것인데, 그 헛된 소문에 따르면 준호와 혜정이 사랑의 집이라는 장애인 공동체를 이루어 장애인들을 핑계 삼고 이용하여 사랑의 집 장애인들을 위해 들어오는 현금과 현품들을 몰래 빼돌려 준호와 혜정이 막 태어난 자신들의 아들에게 다 물려주고 사랑의 집 장애인 가족들은 본래의 모습대로 빈손으로 사랑의 집을 떠나게 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헛된 소문이 입과 귀를 통해, 사랑의 집 장애인 가족들의 상처 깊은 마음속에 더 큰 상처를 안겨주었던 것이고 심지어 날이면 날마다 아침 해가 밝으면 준호가 밤새 가족들의 건강을 살피기 위해 가족들의 방을 두루 살펴보는데 그럴 때마다 가족들은 준호와 시선을 맞추려 하지 않았고 일주일에 한 번 전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가족회의를 열어 가족들의 건강이나 건의사항을 의논하곤 하는 자리에서까지 평상시와 달리 가족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런 모습들을 아무 말 하지 못한 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혜정의 심정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또한, 가족들이 언젠가는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리라고 굳게 믿고 있던 준호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에 이른다.
준호는 한 지붕 밑에서 피와 살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한 형제자매로 살기로 굳은 언약을 하고 모인 사랑의 집 장애우 가족들이 자신을 비롯하여 그동안 가족들을 위해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은 채 헌신적으로 봉사해 온 아내인 혜정마저도 불신하여 내분을 일으키는 장애우 가족들을 위하고 앞으로 사랑의 집으로 들어오게 다른 장애우들을 위하여 한 가지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그 중대한 결심이란 이런 것이었다. 아무리 세상사에 시달리고 찢겨 마음을 비운 장애인들이라 할지라도 육감을 지닌 인간임에는 틀림이 없기에 비록 같은 집 같은 지붕 아래서 한 가족이라 하지만, 준호와 혜정은 가정을 이루어 사랑을 나누며 부부애로 살아갔고 가족들은 그렇지 못하니 때로는 시기와 질투도 날 것이며 또 때로는 자신들도 사랑하는 이와 가정을 이루어 단란하게 살고픈 생각도 들 것이라, 준호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충분히 그럴 수 있기에 준호는 그들의 입장과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고충을 헤아리므로 준호의 직계가족인 혜정과 새로 태어난 준호의 아들, 이렇게 세 사람이 장애우 가족들로부터 분가하여 나오는 것이 상호 간의 입장에도 좋을 듯하여 장애우 가족들은 모두 그대로 두고 이웃에 작은 집 한 채를 마련하여 분가하기로 마음의 결정을 보았고, 얼마 동안 시간을 두고 보다 혜정에게 자신의 뜻을 얘기하고 설득할 생각이었다. 본래 사랑의 집을 이룰 때부터, 앞으로 어떤 시련과 고난의 소용돌이가 불어닥친다 하여도 사랑의 집 모든 가족들이 한지붕 한 가족으로 세상 끝날을 맞이하기로 마음을 모은 바 있어 혜정을 설득하기란 극히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 준호는 혜정과 조용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만을 엿보고 있었다. 혜정은 지금의 이 시련이 훗날 지난 추억의 하나로 사랑의 집 가족들의 기억 속에 기억될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끊임없는 기도와 사랑의 집 장애인 가족들에게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려고 무단한 노력을 하며 또 다른 한 편으로는 한 층 더 큰 사랑으로 장애우 가족들을 보듬어 안고 이 세상 끝날까지 한 지붕 아래서 살기 위하여 정성을 다 하였으나 혜정의 그 큰 사랑과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장애인 가족들의 헛된 생과 의심을 좀처럼 풀 수가 없었다.
한 지붕 밑에서 한 가족으로 살면서도 상대방을 믿지 못하여 늘 가슴 한 켠에 의심을 품으며 살아가야 하는 지옥과 같은 시간의 공간 속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같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악순환이 계속 이어져 갔다. 옛 속설에, -먹기 싫은 음식은 억지로 먹을 수 있지만, 보기 싫은 사람과는 한 지붕 밑에서 같이 못산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옛 속담 중에, -똥은, 곁에 두고 밥을 먹을 수 있지만 사람은, 곁에 두고 밥을 먹을 수 없다. -라는 말도 있듯이 사랑의 집 가족들은, 서로 신뢰하지 못하여 상대방의 입장도 이해하지 못한 채 마음속으로는 싫어하고 미워하면서 까지도 갈 곳 없고 의지할 곳 없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하루해가 동편마루에 뜰 때부터 서편마루로 질 때까지 밉고 원망스러워도 웃고 밝은 모습으로 마주하는 악순환이 계속 이어져 갔다. 그러나 혜정만은 사랑의 집을 준비하고 이룰 때의 그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마음으로 가족들을 마치 자신의 남편인 준호를 대하듯 하였고 준호는 혜정에게 분가하자는 의논을 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으나 준호 역시도 혜정이 너무 헌신적으로 다른 장애우 가족들에게 극진한 봉사를 하기에 쉽사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던 차에, 어느 날 하루는 혜정이 시간 여유가 조금 있는듯 하여 말을 꺼냈다.
-저, 혜정씨! 나랑 얘기 좀 하지.
-네, 무슨 말씀인지 해 보세요.
-우리 부부이면서도 그동안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많은 대화가 없었죠.
-미안해요.
-새삼스레 무슨 말이요. 미안하긴 내가 더 미안하지.
-그래, 제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요?
-응, 다름이 아니라......
-호호호 무슨 말씀인데 그렇게 뜸을 들이세요.
-아무 걱정말고 말씀해 보세요.
-그게 말이요......
-또 이러시네.
-그럼 얘기 하겠소.
-네, 하세요.
-혜정씨! 우리 분가하는 것이 어때?.
-네엣! 분가라뇨?
-누가 어디로 분가를 한단 말이에요?
-으응, 우리 부부와 우리 아기.
-네엣!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얼굴을 마주하기 싫은 사람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얼굴을 대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죄요 벌이 아니겠소.
-아니,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세요?
-갑자기가 아니라......
-그런 말씀 마세요,
-저는 이렇게 우리 장애우 형제, 자매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는데, 분가라뇨?
-물론, 준호씨 그 마음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만는 우리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봐요. 그러면 우리가 처음과 같이 참 평화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거에요.
-그래도 혜정씨가 너무 힘들어서......
-아뇨, 전 괜찮으니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런 말씀 마세요. 그리고, 전 우리 장애우 가족들도 준호씨와 똑 같은 가족으로 생각해 왔고, 앞으로도, 제 마음 변치 않을 거에요.
이 말을 하는 혜정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고, 언제까지 이어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곁으로 보기엔 평화롭기 그지없는 사랑의 집 안팎엔 먹물 빛 짙은 어둠이 내린 가운데 고요가 내리고 있었다. 그 누가 그랬던가, 악재 중의 악재라고 말이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믿고 의지해야 할 가족들 사이에 불신의 울타리가 가로막혀 전과 같은 가족 상호 간의 신뢰와 믿음은 사라 진지 이미 오래되었고 준호와 혜정의 부부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이 준호 부부를 따돌리기가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불신의 울타리가 짙게 깔린 사랑의 집 안팎에 다시 한번 악재의 검은 손길이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구정 설 명절이 지나고, 정월 대보름날이 되자 사랑의 집이 위치한 곳이 시골인지라 남성 어른들은 모여서 한 해의 안녕을 비는 뜻에서 농악놀이를 겸한 지신 밝기로 한참이었고 여성 어른들은 달맞이를 비롯해서 강강술래 등 예부터 내려오는 민속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몰랐으며 개구쟁이 동네 꼬마들은, 작은 빈 깡통에다 불을 담아 줄을 묶어 돌리는 쥐불 놀이로 날 새는줄 몰랐다. 몸이 성치 못한 장애우 가족들은 마음만은 간절하였으나 흥겹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마을 주민들의 무리에 끼지도 못한 채 그저 집안에 묶여 그들이 노는 모습들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악의 세력은 나약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더욱 위세를 떨치는 법, 교활하기 그지없는 악의 세력이 불쌍한 사랑의 집 가족들이라 하여 그냥 편히 둘 리가 만무하였고 간교한 악의 손길은 힘없고 연약한 사랑의 집 가족들에게 다시 한 번 큰 상처를 안겨주고 말았다. 지신 밝기를 하는 농악 소리에 맞추어 달맞이를 하는 동네 아낙들의 조용한 외침과 쥐불 놀이를 하는 동네 꼬마들의 식을 줄 모르는 고함소리가 동네 안팎을 뒤덮을 즈음,“불이야!“하는 외마디 고함소리와 함께 사랑의 집 안팎은 순식간에 붉은 화마에 휩싸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허공을 향해 치솟는 불길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고 아무리 장애인이라 할지라도 인간 본연의 자기 생명의 애착심으로 살아보려고 평소에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히 여기던 가족들을 뒤로 헤집고 서로 먼저 밖을 뛰쳐나오려고 하는 가족들의 외마디 비명소리로 온 마을은 뒤범벅이 되었다.
장애우 가족들의 뒷바라지로 지쳐 밤늦게서야 잠자리에 든 혜정, 준호가 놀라 황급히 깨웠을 땐 이미 집 안팎은 화마에 휩싸여 사랑의 집 건물이 반쯤은 이미 다 타버렸고 짙은 연기에 기침을 하는 이들, 불에 그을려 살점이 검게 탄 이들이 집 안팎 이곳저곳에 쓰러져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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