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소식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 (22) 마음 열기 ④

松竹/김철이 2008. 7. 11. 16:16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 (22) 마음 열기 ④

 

 

성령에 의한 ‘영감·갈망’ 기도하라

나 자신 위한 ‘충동·열망의 기도’ 의미 없어
하느님 초대 응답하려면 기꺼이 마음 열어야

‘시옷’ 발음을 잘 하지 못해 고통 받았던 초등학생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창피함 때문에 고개도 떳떳이 들지 못한다. 늘 바닥만 바라보고 다니고, 남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한다. 자신을 비난하는 친구들이 꼴도 보기 싫어지고, 마음속은 미움으로 가득 차게 된다. 책 읽기를 강요하는 선생님도 원망스럽다. 이 초등학생은 자신이 처한 상황 전체를 싫어하게 되고 결국 자신 내면의 캄캄한 곳으로 숨어 버린다.

그래서 이 초등학생의 기도는 초월적이고 영적인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저 “시옷 발음을 잘해서 친구와 이웃들 앞에서 떳떳해 질 수 있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할 뿐이다.

우리가 하는 기도도 대부분 이 초등학생의 기도와 다를 바 없다. 우리가 하는 기도는 “하느님, 당신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느님 당신의 뜻을 가르쳐 주세요”라는 기도가 아니다. 우리는 대부분 하느님의 뜻에 나 자신을 연결하는 기도가 아니라, 때를 쓰듯이 “내 뜻이 이뤄질 수 있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바친다.

여기서 우리는 ‘영감’(Inspiration)과 ‘갈망’(Aspiration), ‘충동’(Pulsion)과 ‘열망’(Ambitions)이라는 용어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영감은 성령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느낌과 생각이다. 영감이라는 것은 혼자서 무슨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내 머리 속에서 나 자신의 힘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영감은 성령께서 뭔가를 주시는 것이다. 또한 갈망은 성령의 영감을 받기 위해내 정신의 뜻·계획·생각·상상·판단보다 조금 더 깊은 차원의 당신의 뜻을 알려 달라고 하느님께 청원을 드리는 것을 말한다. 나 자신의 것은 청원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쉽게 말하는 “나 오늘 영감 받았어”라고 할 때의 영감도 영감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다. 혼자서 생각하고 상상하고 나서 영감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다. 영감과 갈망이라는 말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만 쓸 수 있는 용어다. 이에 비해 충동은 육신적인 에너지이고, 열망은 정신적인 차원에서 나오는 에너지라고 말할 수 있다. 충동과 열망은 하느님이 아닌 나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시옷 발음을 할 수 없었던 초등학생은 육신적 차원과 정신적 차원의 고민에만 함몰되어 있었다. 충동과 열망만이 가득했다. 영감과 갈망이 없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기도를 하지 못했다. 자신의 고민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노력을 하지 못했다. 그저 창피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기만 한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자신 모습을 부끄럽게 여기기만 했다. 그 원인과 내용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았다. 기도를 했지만 그 기도는 충동과 열망의 기도였다. 이 초등학생의 기도는 나 자신이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대부분 신자들의 기도도 이 초등학생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기도는 충동과 열망이 아닌, 영감과 갈망의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선 우선 자신의 실제적 삶의 형태(actual life form)를 조목조목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어떤 삶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지, 또 어떤 형태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좀 더 높은 차원의 형태로 진화시켜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에 귀 기울여 듣고 그 초대에 응답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기꺼이 열어 놓아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존재하도록 의도되었던 그 존재들이 되기 위해선 열려 있어야 한다. 영적으로 성숙하는데 필요한 모든 지시와 지침들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드러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하느님과 세상에 개방된 자세에서이다.

열려 있지 않으면 나 자신 속에 함몰 되고 만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기도하지 못하고 “내 소원을 들어 주세요”라고 기도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진정한 영적 성숙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하느님을 만나는 진정한 행복도 누릴 수 없다.

심리학은 신체와 정신적인 차원에서 인간을 분석하지만 이 분석은 이제 영적 차원으로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우리들의 실제적인 삶의 형태는 지속적으로 변한다. 오늘의 삶의 형태와 내일의 삶의 형태가 다르다.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그 중심에 갈망과 영감의 관걔 안에서 발생하는 초월과 영성이 있다.

그냥 대충 “겸손하고 착하게 살된 돼”라고 생각해선 안된다. 우리에게는 더 높은 차원의 그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출처:가톨릭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