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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 | 발씻김의 열매: 착한 목자의 탄생 | 2026년 부활 제7주간 금요일

松竹/김철이 2026. 5. 22. 07:00

[발씻김의 열매: 착한 목자의 탄생 ] 2026년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_PZWuohTpd0

 

 


부활 제7주간 금요일 - 발씻김의 열매: 착한 목자의 탄생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먹여라." (요한 21,17)

찬미 예수님! 부활 제7주간 금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가장 마지막 장, 곧 예수님과 베드로의 지독했던 사랑과 배신의 서사시가 마침내 아름다운 해피엔딩으로 완성되는 가슴 벅찬 에필로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해 허탈해하는 제자들을 티베리아스 호숫가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숯불을 피워 빵과 물고기를 구워놓고 그들을 기다리십니다. 식사를 마치신 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을 연거푸 물으시며 "내 양들을 먹여라"라는 위대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이 숯불 앞의 신비를 온전히 풀기 위해서는, 시간을 거슬러 예수님의 수난 전날 밤, '최후의 만찬' 성목요일의 다락방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은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기 시작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기겁하며 거부했습니다.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 (요한 13,7)
베드로가 그날 밤 깨닫지 못했던 '발 씻김의 진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단순히 "너희도 서로 겸손하게 봉사해라"라는 도덕적인 교훈이 아니었습니다. 이 발 씻김은 곧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질 처절한 '파스카의 신비'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어주신 것은, "내가 십자가에서 흘릴 나의 피로, 세상의 욕망과 교만에 찌든 너희의 그 얄팍한 '자아'를 완벽하게 죽이고 씻어내어, 이제부터 이 영혼의 주인이 '나 그리스도'임을 선포하겠다"라는 위대한 소유권 이전의 예식이었습니다.
이 기막힌 신비는 구약성경 탈출기 12장의 '파스카 어린양의 피' 규정에서 이미 완벽한 설계도로 주어졌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날 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집의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라고 명령하십니다. 문설주는 집을 떠받치고 출입을 통제하는 집의 가장 아랫부분, 즉 신체로 치면 '발'에 해당합니다.
왜 굳이 피를 그곳에 발라야 했을까요? 죽음의 천사가 지나갈 때, 문설주에 발린 그 처절한 피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집의 첫째 아들, 즉 이 집을 지배하던 교만한 자아(이집트의 맏아들)는 이 피와 함께 이미 죽었다! 이 집의 소유권은 이제 하느님께로 넘어갔다!" 피가 발린 집은 죽음이 건너뛰고(Passover), 참 생명이 주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행위는 바로 그 파스카 어린양의 피를 제자들의 문설주(발)에 바르는 거룩한 행위였습니다. "너를 지배하던 네 낡은 자아는 이제 내 피로 죽었다. 이제 네 인생의 주인은 나다." 이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날 밤, 그 씻김을 끝까지 거부하며 자신의 낡은 자아를 펄펄 살려두었습니다. "다른 이들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주님을 위해 내 목숨을 내놓겠습니다!"라며, 자기 삶의 주인이 여전히 '자기 자신'이라고 뻗대며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짜 자존심은 대사제의 뜰에 피워진 '첫 번째 숯불' 앞에서 여지없이 붕괴되었습니다. 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도망쳤을 때, 베드로는 자신이 집을 지킬 능력도 없는 얼마나 쓰레기 같고 무력한 빚쟁이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그리고 그런 비겁한 자신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다 쏟아 집값을 지불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목격하며, 베드로의 그 질기디질긴 이기적인 '자아'는 마침내 산산조각이 나고 완벽하게 씻겨 나갔습니다. 이제 영혼의 방이 비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은 똑같은 '두 번째 숯불'을 호숫가에 피워놓으셨습니다. 과거 배신의 트라우마가 서린 그 숯불 앞에서, 이제 옛 주인이 쫓겨나고 자아가 완전히 죽어버린 베드로에게 새 주인이신 예수님은 첫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베드로가 자신의 전문 지식과 고집(자아)을 완전히 버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찢어질 듯이 무거운 물고기들이 올라왔습니다. 그 숫자가 무려 '153마리'였습니다. 성 예로니모를 비롯한 교부들은 이 153이라는 숫자를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던 온 세상 물고기의 종류, 즉 이 세상 모든 민족을 상징한다고 풀이했습니다. 즉, 자아가 죽어 하느님이 주인이 되신 베드로는 이제 하느님의 그물을 던져 '온 세상의 하느님 자녀들'을 빠짐없이 낚아 올리는 거룩한 어부로 완성된 것입니다.
이제 가장 소름 돋는 기막힌 반전이 시작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 153마리의 물고기(하느님의 자녀들)를 끌고 예수님이 피워두신 숯불 앞의 식탁으로 모여듭니다. 예수님은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이 아침의 식탁이 구약성경의 어떤 장면과 완벽하게 겹쳐지는지 아십니까?
탈출기 24장을 보면,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백성들과 파스카 희생 제물의 피를 뿌려 하느님과 거룩한 계약을 맺는 장면이 나옵니다. 계약이 완수되자 하느님은 모세와 일흔 명의 원로들을 시나이산 꼭대기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은 그 거룩한 산정에서 하느님을 직접 뵈며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는 엄청난 기쁨의 식탁을 누립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고 나서 먹고 마셨다." (탈출 24,11).
오늘 티베리아스 호숫가의 숯불 식탁이 바로 그 새로운 시나이산의 정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자아를 죽이는 새로운 세족례(계약)를 완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아가 씻겨진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제 단순한 어부가 아니라,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한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우주에서 가장 고귀하고 거룩한 하느님의 영적 동반자(원로)로 그 신분이 수직 상승한 것입니다.
이 거룩한 식탁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의 목숨을 다한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굳이 세 번을 물으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대사제의 뜰 숯불 앞에서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의 그 뼈아픈 과거를, 똑같은 숯불 앞에서 세 번의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통해 완벽하게 치유하고 상계(Offset) 처리해 주신 것입니다.
이 회복의 고백이 끝나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양들을 먹여라." (요한 21,17).
이 짧은 명령을 그리스어 원문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어떤 역할을 이양하고 계신지 그 장엄한 무게가 드러납니다. 주님은 첫 번째와 세 번째에는 "내 어린 양들을 먹여라(Βόσκε, 보스케)"라고 하셨고, 두 번째에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Ποίμαινε, 포이마이네)"라고 하셨습니다.
'보스케(Βόσκε)'는 단순히 육신의 밥을 준다는 뜻을 넘어,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영혼을 온전히 양육하라는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반면 '포이마이네(Ποίμαινε)'는 목자가 되어 앞장서서 인도하고, 늑대로부터 보호하며, 목숨을 걸고 책임지는 '전인격적인 돌봄'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님이 "이제부터 이 양들은 네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철저하게 "내 양들(μου)"이라고 소유권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양들은 베드로의 소유가 아닙니다. 양들의 진짜 주인은 피를 흘려 그들을 사신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양 떼를 이끄시던 당신의 그 '착한 목자'의 역할을 이제 베드로에게 고스란히 이양하고 계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인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내 양처럼 여기며 목숨 걸고 먹이고 보호해야 할 거룩한 '청지기'로 파견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목자로서 양들을 이끄셨던 것처럼, 이제 네가 하느님의 양 떼를 이끌라는 엄중한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자아가 죽고 하느님과 한 몸이 된 청지기 베드로는 양 떼에게 도대체 무엇을 먹이고 돌보아야 할까요? 푸른 풀입니까? 아닙니다. 베드로가 세상 사람들에게 먹여야 할 진짜 양식은 바로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느님의 양들을 맡기시며, 그들의 입에 영원한 빵인 '성체'를 먹이라고 하십니다. 성체는 단순히 배를 불리는 위로의 떡이 아닙니다. 파스카의 피로 우리의 문설주를 발라 자아를 쫓아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입니다. 베드로가 양 떼에게 성체를 먹인다는 것은, 그 양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세상에 짓밟히는 한낱 짐승 같은 피조물이 아닙니다. 이 거룩한 빵을 먹는 여러분은 예수님의 피로 낡은 자아가 죽고, 예수님의 피를 물려받아 결국 하느님과 똑같이 완전해질 수 있는 신적인 본성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가톨릭 신학의 정수인 '신화(Deification)', 즉 인간이 하느님이 되는 기적입니다. 양 떼가 늑대의 위협이나 세상의 유혹 속에서도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교회를 굳건히 지켜내는 유일한 힘은, 바로 내가 하느님의 밥상에 앉아 하느님의 피를 먹는 '우주의 상속자'라는 이 엄청난 자존감에서 나옵니다.
내가 세상의 실패자나 찌질한 죄인이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과 한 식탁에 마주 앉아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하느님처럼 될 수 있는 존재라는 이 폭발적인 자존감을 가슴 깊이 새기십시오. 세상의 파라오들 앞에서 주눅 들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주님의 이름을 부여받은 '또 다른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세상 밖으로 나가, 두려움에 떨며 상처받고 흩어진 이웃들에게 "당신도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라는 그 찬란한 이름표를 달아주며 먹이고 돌보는 참된 목자로 파견되십시오. 우리가 베드로처럼 내 자아를 죽이고 이 거룩한 식탁의 밥을 먹으며 주님을 사랑할 때, 우리 삶의 모든 실패와 숯불의 상처는 하느님과 영원한 계약을 맺는 시나이산의 눈부신 영광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