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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성당 주임) | 연중 제7주일 복음 특강 |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하느님 자녀의 자격일까?

松竹/김철이 2025. 2. 23. 07:00

[연중제7주일 복음특강]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하느님 자녀의 자격일까?I전삼용 요셉 신부님(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성당주임)2025.2.23천주교 /가톨릭/신부님강의/가톨릭스튜디오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xjMfjendkV0

 



연중 제7주일 –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하느님 자녀의 자격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해야만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원수도 하느님의 자녀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미움은 생명을 죽이는 일입니다. 형제가 형제의 생명을 죽이는데, 어떻게 하느님께서 그 아이를 자녀라고 계속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한창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심판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핵심은 무엇일까요? 헌법에 따르면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국민이 아버지라 할 수 있습니다. 윤석열 측이 주장하는 바대로라면 이 계엄은 ‘계몽’을 위한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계몽을 위해 형제의 목에 칼을 들이댄 것에 대해 국민들이 ‘아, 이것은 형제의 잘못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이해할 수 있다!’라고 해야 당연할까요? 그것을 당하는 측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이는 옳고 그름보다 더 중요한 인간 존엄을 무시한 행위이기 때문에 그 생명을 주신 이에게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비’는 아버지에게 합당한 자녀로 인정받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카인의 예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하느님은 형제의 생명에 위협을 가한 자녀를 계속 자녀로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화 ‘핵소 고지(Hacksaw Ridge)’는 2차 세계대전 당시 75명을 구한 실제 인물인 데스몬드 도스(Desmond Doss)의 삶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데스몬드 도스는 종교적·도덕적 신념 때문에 총을 들지 않는, 이른바 ‘양심적 병역 거부자’임에도 불구하고 전쟁터에서 수많은 전우의 생명을 구해냈습니다. 

 데스몬드와 어떻게 생명에 대해 소중함을 알 수 있었을까요? 그는 형제에게 치명상을 입힐 뻔했던 사건과 아버지에게 총을 들이댄 일을 통해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이의 생명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옳고 그름도 생명을 위협하는 일을 합리화 할 수는 없습니다. 

 데스몬드 도스의 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로, 전쟁 후유증과 알코올 의존으로 인해 폭력적으로 변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가족에게 거친 언행을 일삼았고, 때때로 총기를 꺼내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심하게 술에 취해 어머니에게 폭력을 가하려 들자, 이를 본 도스가 아버지의 총을 빼앗아 아버지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충격적인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 순간 도스는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려다가, 오히려 아버지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사실에 전율을 느낍니다. 그는 어린 시절 형에게 가한 폭력의 기억까지 겹치면서, “가족 간에조차, 아니 누구에게라도 총을 겨누는 순간 인간의 자격을 잃게 된다.”라는 걸 절감하게 됩니다.

 용서는 결국 용서받는 대상은 물론이요 더 많은 이의 생명을 구하는 길입니다. 저희 어머니도 고아로 자라면서 당신을 학대하는 어른들에게 지쳐 그들도 죽이고 당신도 죽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촌으로 들어가시며 “저들도 사는데, 넌 왜 못 사니?”라고 하시는 것을 듣고는 당신 생각을 접습니다. 만약 그 생각을 접지 않았다면 저도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고 많은 이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하느님께 가셨을 때는 하느님께 용서받은 자로서의 자격이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지옥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용서는 용서받았으니 가능합니다. 만약 아이가 걸음마를 할 때마다 못했다고 때린다고 하면 아이는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모는 자기 부모에게 사랑받았으면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부모의 자녀라고 할 자격도 없습니다. 

 용서해도 그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장 발장과 자비르 경감의 예처럼 장 발장은 용서받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고 자비르 경감은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계속 용서하지 않는 자로 남아있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살을 선택합니다. 심판은 주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자로서 용서하는 자녀의 모습만 보이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