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6주일 복음 특강] 행복은 사랑해서 고생하는 것 I 전삼용 요셉 신부님(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성당 주임) 2025.2.16 천주교/가톨릭/신부님강의/가톨릭스튜디오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cprEy7NPMdI
연중 제6주일 – 행복은 사랑해서 고생하는 것
오늘은 루카 복음의 행복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행복 선언은 좀처러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니 말이 됩니까? 아무리 봐도 세상에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또는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배고픈 게 행복하다면 음식은 왜 먹어야 할까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러면 도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우느냐면, 예수님의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라는 말씀대로 박해받고 모욕과 중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 말씀은 ‘사랑’을 개입시키면 아주 잘 이해가 됩니다. 사랑하면 가난해지고, 굶주리게 되고, 겸손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해서 고생하는 게 행복’이란 뜻입니다. 100세를 넘기고도 활발한 활동을 하신 김형석 전 연세대 교수가 내린 행복론의 결론입니다.
‘어린 왕자’는 작은 자신의 별에 꽃이 한 송이 피어난 것을 발견합니다. 어린 왕자는 그것을 위해서 가난해집니다. 자기 모든 에너지를 그 꽃을 보호하기 위해 쏟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먹이려고 배고파지고, 그것의 짜증을 다 받아내며 슬프고 겸손해져야 했습니다.
그러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그 꽃이 피어있는 자기 별을 떠납니다. 여행하던 중에 각자 행복을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자기 별에서 혼자 왕 노릇을 하는 사람, 자신에게 칭찬해 주고 손뼉 쳐 주기를 바라는 허풍쟁이, 세상 고통을 잊으려 온종일 술만 마시는 술꾼, 돈만 아는 사업가, 의미 없이 혼자 사는 별에서 일만 하는 가로등 켜는 사람, 지식을 뽐내는 지리학자 등입니다. 이들은 부자이고 배부르고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외로워 보입니다.
지구에 내려온 어린 왕자는 비행기 조종사와 사막여우를 만나 우정을 싹틔웁니다. 사막여우는 관계를 위해 큰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깊어질 때 그 노력이 무색할 정도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경험을 통해 자신의 별에 있는 자기를 괴롭혔던, 그 사랑스러운 꽃 한 송이를 다시 기억합니다. 어린 왕자는 비록 가난해지고, 배고프고, 멸시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참 행복은 그것을 쏟을 수 있는 사랑하는 누군가가 존재함임을 깨닫고 다시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니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안다면 참행복은 ‘사랑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난해지셨습니다. 하느님의 지위를 내려놓으시고 한 인간으로서 사시기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변화됩니다. 안젤로라는 의사 선생님은 학생 때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 힘들어했습니다. 성령 안수 기도를 받는 중에 가난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뚫어진 손과 찔린 가시관이 곧 자신 때문에 가난해진 예수님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예수님은 저의 배를 불리시는 분이셨습니다. 말씀을 깨닫고 싶었고 하느님이 저를 사랑하심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하느님은 어쩔 수 없이 양식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어머니의 배를 채워야 할 젖을 아기에게 주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그 양식을 먹으며 배가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이런 행복을 추구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셨고, 그 행복에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배불리려면 배고파져야 합니다. 마더 데레사는 수많은 배를 곯는 사람들 앞에서 항상 배가 고플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행복임을 알았기에 행복하셨습니다.
김희아 씨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어떠실까요? 희아 씨는 모반 때문에 부모에게 버려지고 친구들에게 괴물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손이 지우개가 되게 해 달라며 자기 얼굴이 까지도록 문지르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자신보다 더 슬피 우시는 예수님을. 그분이 나의 처지를 위해 울어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이 우리를 덮어주기 위해 세상에 오셨음을 믿게 될 수 있을까요? 모든 순교자들은 이 세상의 지위를 버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고통과 멸시를 선택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어떤 강의에서 이런 내용을 들었습니다. 사랑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작은 십자가를 질 줄 아는 것부터 배우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단 어린아이에게 햄스터를 한 마리 선물해 줍니다. 그 햄스터는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정성을 다해 먹지를 주고 아프지 않도록 보살펴 주었습니다. 사랑하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햄스터의 평균 수명은 2~3년입니다. 금방 죽습니다. 이때 아이는 큰 상처를 받습니다. 부모는 “또 햄스터 키울 거니?”라고 묻습니다. 아이는 울면서 절대 안 키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1~2년 지나면 또 키우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번에 아이가 햄스터를 대하는 방식은 조금 다릅니다. 이제 내가 열심히 해 주어도 햄스터가 곧 죽을 것을 압니다. 그래도 열심히 행복하게 살게 해 줍니다. 사랑을 위한 자기희생만이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행복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추적 60’분이란 프로그램에서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한 사제의 이야기가 방영된 적이 있었습니다. 오토바이를 탄 한 학생이 건널목을 건너는 신부님을 치어 사망하게 했습니다. 교구에서는 신부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그 학생을 용서했을 것이라며 학생이 감옥에 가지 않도록 배려했습니다.
그 신부님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찾아낸 물건이라고는 낡은 라디오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통장에도 적은 돈이 있었지만, 그것은 안 받으려던 강의료를 억지로 받아서 나중에 학생들에게 한꺼번에 선물하려고 모아놓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실제로 당신을 위한 재산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매스컴에 보도되었고 세상 사람들은 사제의 그런 가난한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왜일까요? 느닷없이 준비도 못 하고 돌아가셨는데도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가난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베풀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행복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 섭니다. 사랑해서 고생하는 행복을 추구할 것인지, 사랑 없이 편한 삶을 선택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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