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받아들이는 법: 시험에 들어보라!]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5 02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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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다해 연중 제5주간 월요일 – 성령을 받아들이는 법: 시험에 들어보라!
찬미 예수님. 오늘은 마르코복음 5장에 나오는 게라사 지방 주민들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이에게서 악령을 쫓아내시자, 수천 마리에 달하는 돼지 떼가 호수에 빠져 몰살당했는데, 그 광경을 본 주민들은 놀라고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자기네 고장에서 떠나 달라고 청합니다.
왜 그들은 ‘하느님의 권능을 직접 목격하고서도’ 예수님을 배척해야만 했을까요? 바로 손에 잡히는 재산(돼지 떼)을 잃는다는 두려움이, 구원과 은총을 놓고 저울질했을 때 더 크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자주 반복됩니다. 세속·육신·마귀가 제공하는 그럴싸한 유혹이 너무 익숙하고 실체감 있어 보이기에, 영원한 가치를 제시하는 성령을 뒤로 미루거나 아예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느님께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가, 욕망에 빠져 이를 스스로 내려놓고 만 인물들의 예가 많이 나옵니다. 먼저 사울을 살펴보면, 그는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으로서 기름부음을 받고 출발했지만(1사무 10장 참조), 점차 자신의 권력에 도취 되어 교만해집니다. 1사무 13장과 15장에 보면, 그가 사제로서의 권한도 아닌데 마음대로 제사를 집전하고, 주님의 명령을 어겨 전리품을 챙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내가 왕이니 이 정도쯤이야” 하는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무엘이 “주님께서 당신을 버리셨습니다.”(1사무 15,26)라고 선언할 정도로,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과 사명을 사울이 스스로 무너뜨렸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 사울의 교만한 행보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몰락과도 닮았습니다. 나폴레옹은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유럽을 호령하며 황제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점차 자신의 절대 권력에 빠져 무리한 원정(특히 러시아 침공)을 감행함으로써 결국은 파멸로 치달았습니다. 겸손히 한계를 인정하기보다 자신을 절대화하면, 하느님이 부어 주시는 은총의 그릇이 거꾸로 뒤집혀 버리는 것이지요. 그는 교회에 의해 씌워지던 황제의 왕관을 자신이 직접 쓴 최초의 황제가 됨으로써 교회에서 오는 은총을 스스로 단절해 버렸습니다.
다음으로 다윗을 떠올려 봅시다. “당신은 내 마음에 드는 사람”(1사무 13,14 참조)이라는 칭찬을 받을 정도로 하느님께 사랑받던 임금이었지만, 2사무 11장에서 밧세바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간음죄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야까지 제거해 버렸습니다. 한순간의 육체적 욕망이, 하느님께 받은 뛰어난 은총과 왕으로서의 위엄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는 회개를 통해 다시금 하느님께 돌아가지만, 가정사에서부터 정치적 분열까지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이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도 흡사합니다. 헨리 8세는 자신의 결혼 문제(육체적 욕망과 후계 문제 등)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교황청과 불화를 일으키고, 결국 영국 국교회를 분리시키며 파란만장한 역사를 만든 인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열쇠는 교황에게 있지만, 성공회를 교황과 단절되게 함으로써 자기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교황한테서 오는 성령의 은총을 단절시켰습니다.
솔로몬 역시 지혜의 왕으로 불릴 만큼 은총을 받았으나, 재물과 쾌락에 집착하다가 영적 중심을 잃어버립니다(1열왕 11장).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치와 이방 아내들이 늘어가면서, 하느님을 버리고 이방 신까지 섬기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이것이 훗날 이스라엘 왕국이 남북으로 갈라지는 원인이 되었다는 점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몰락은 영화 「월 스트리트(Wall Street)」에서 잘 드러납니다. 1980년대 뉴욕 증권가를 배경으로, 주인공인 젊은 주식중개인 버드 폭스(Bud Fox)는 부와 성공을 좇다가, ‘탐욕은 선(Greed is good)’을 외치는 대부 격인 고든 게코(Gordon Gekko)의 꾐에 빠져 불법과 비리를 저지릅니다. 처음에는 급격히 성장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모든 진실이 폭로되면서 재산과 명예를 잃고, 스스로도 깊은 자괴감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돈이 곧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착각이 얼마나 위험하고 허망한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이 얼마나 영혼의 평화와 정직을 포기하게 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처럼 교만, 육체적 욕망, 재물에 대한 집착이 크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은총보다 눈앞의 돼지 떼가 훨씬 더 커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체험해 보니, 이 벽은 ‘한 번도 내려놓아 보지 않았을 때’ 더욱 견고하게 느껴질 뿐, 막상 용기를 내어 내려놓으면 정말 큰 자유와 기쁨이 찾아옴을 알게 됩니다.
저 자신도 세속을 이기기 위해 처음 십일조를 결심할 때 “이러다 생활이 힘들어지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처럼 “나를 시험해 보아라.”(말라 3,10)를 실제로 해 보니, 오히려 돈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이 생기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하느님께서 채워 주시는 경험을 했습니다.
또 사제로서 여자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 한편으로 두렵기도 했지만, 그 길 위에서 오히려 더 폭넓게 사랑하고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게 되었음을 체감했습니다. 한 여인을 사랑하거나 사랑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오히려 감옥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술 역시 “피부병 때문에 안 마셔야 한다.”라고 결심하고 한 달을 안 마시고 살아 보니, 몸도 좋아졌을 뿐 아니라 “왜 그동안 술의 즐거움에 애써 의존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가뿐해졌습니다. 결국에는 ‘해 보기 전에는 두렵고, 한번 내려놓아 보면 예상치 못한 은총이 열린다.’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게라사인들이 돼지 떼를 지키려 예수님을 내쫓은 사건은, 결국 하느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시험해 보아라.”(말라 3,10)라고 하신 말씀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며칠만 예수님께서 함께 계셨다면 분명 더 성령의 열매, 곧 기쁨과 평화가 샘솟아 행복해짐을 느끼지 못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 서두르고 시험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자기 생각이 맞는다고 교만해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은 분명 세.육.마.를 이기는 만큼 내 안에 들어와 나에게 은총의 성물을 주십니다. 그런데 세.육.마.를 이기는 방법은 한 번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행복해지는지 느껴보는 것입니다. 해 보고 안 되면 돌아오면 됩니다. 그러나 해보지도 않고 물리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십일조부터 1년 동안 시험해 봅시다. 돈도 넉넉해지고 성령도 자신 안에 넉넉해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