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 20240929 오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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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부산교구 장산성당 연중 제26주일 오늘의 말씀입니다.
“막지 마라.”
사도행전에는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세상이 주님의 제자들로 이어진 교회를 박해했고, 그 박해에는 ‘사명감’을 가지고 사람들을 죽음까지 몰아갔던 사도 바오로의 모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분의 가르침은 알지 못하고 알 필요도 없으며 ‘거짓’이라 판명된 가치는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야 할 사명감으로 가득했던 바오로의 모습은 예수님을 박해했던 이들의 뜻이 세상에 어떻게 잔인하게 전파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그런 일을 신앙행위로 여겼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의 존재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위협을 느낄만큼 무서운 가치였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종교를 세우기 위해 오신 것도, 또 당신을 알리려고 오신 것도 아니셨습니다. 온전히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리고 그들을 진리로 돌아오게 하려 애를 쓰셨고 세상이 골라내고 버린 듯 느껴지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다시 아버지 품으로 모아들이시려는 노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힘을 지닌 이들’이 만든 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에, 그분이 힘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임을 이용해 그들은 위인들을 몰래 죽여오던 관습에서 대범하게 주님을 공개적으로 죽이는 일을 벌입니다.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박해 이전 예수님의 무리에도 그런 모습이 있었다는 것을 복음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그것도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로 알려져 있는 요한 사도를 통해 보게 되는 모습입니다. 함께 하는 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해 어려운 이를 돕는 모습을 인정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예수님이 사람이 되심으로 인해서 내몰리셨던 사람들의 편견의 무서움을 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든, 어떤 생각과 마음을 지녔든, 어떤 삶을 살든 우리 편이 아니면 다 무시하고 그를 공격하려는 시도는 예수님의 무리 안에서도 있었다는 것이 무섭기까지 합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실 때라고 해서 모든 이가 주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모두가 주님의 기적을 체험한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 유명한 신앙의 대가들이 존재하지만 모두가 그들의 가르침을 받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그들이 서로를 나누고 평가하며 다툼을 벌이는 것이 당연하고 합당하다고 말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품에 양들을 모으려 모든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그것은 소문으로만 그분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도 모자람 없이 영향을 받았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2천 년을 사이로 주님의 시간대와 차이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고 또 고민을 해도 현장에 있지 못하고 그 말씀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치자면 우리 역시 그들의 한 무리라는 우리의 주장을 인정받을 수 있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압니다. 글로 다 전해지지 못한 그 모든 여백을 통해 전해지는 뜻은 그때와 지금이 다르지 않고 그 이유는 모두 하느님이 채워주시고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사는 집전자와 대상 이전에 예수님께서 여전히 직접 하고 계심을 알고 있고 그래서 세상 누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하느님 모상의 근본을 지니고 있음도 우리는 압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들도 피하지 못한 이 편협함과 못난 모습을 주님이 얼마나 경계하셨는지 주님의 진짜 무서운 경고를 통해 경계해야 할 우리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하신 진짜 당부가 먼저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면 그 모습에서 그리스도가 보여야 합니다. 그게 당연한 것입니다.
0:00 오늘의 복음
2:02 "막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