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꿀샘

전삼용 요셉 신부님 | 누구나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키울 수 있다 , 사순 제4주간 금요일, 2024 03 15

松竹/김철이 2024. 3. 15. 07:06

[누구나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키울 수 있다 ]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4 03 15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3jDZfPwjYnE

 

 

 

2024년 나해 사순 제4주간 금요일 – 누구나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키울 수 있다 

『하.사.시.』에 나오는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합니다. 예수님께 어떤 이방 여인이 다가와 남편이 싸움하다가 머리에 상처를 입어 의사의 말로는 실명이 될 것이 확실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시메온이라는 남편은 이전에 죄를 지었다가 아내의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신 적이 있는 남자였습니다. 그의 삶이 다시 냉혹과 탐욕으로 비뚤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사정은 알지만, 그가 용서받고 죽어 천국에 갈 것인지, 아니면 치유 받고 지옥에 갈 것인지 선택하라 합니다. 갈등하던 여인은 남편의 영원한 생명을 선택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도 같은 선택을 하게 하십니다. 
남자는 “용서하십시오! 용서하세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지난번처럼 선생님의 용서를 주십시오! 그러나 지난번처럼 병도 고쳐 주십시오. 아리아! 아리아! 나 당신에게 맹세하오. 다시는 폭력도 쓰지 않고 속임수도 쓰지 않겠소. 나는….”라며 죽음의 공포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약속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청하는 것이 속죄하기보다는 죽음이 두려워 그러는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가 뉘우치도록 그의 아내에게처럼 두 가지를 제시하시고 하나를 선택하라 하십니다. 그도 지금 죽음과 심판, 지옥의 공포를 느끼고 있으므로 결국 “제 병을 고치기 위해 손을 들지 마시고, 저를 용서하시고, 저를 붙잡고 있는 마귀에게서 저를 구해내시기 위해 손을 드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내미시어 용서해 주시니 그는 이내 눈물을 흘리며 잠이 듭니다. [출처: 『하.사.시.』 6권 150장]

결국 예수님은 그 사람의 병을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평화를 주셨습니다. 두려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의 근원은 모두 ‘죽음’입니다. 두려움은 살려는 욕구에서 생깁니다. 더는 잃을 게 없다면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죽이려 하는데도 당당하게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십니다. 아직 당신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운명을 아버지께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누구보다 강력한 분이셔서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누구도 당신께 손을 댈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를 이기기 위해 더 가지려 하고 더 먹으려 하고 더 강해지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죽음의 공포를 이기게 할 수 있을까요? 만리장성을 쌓는 일은 힘이 듭니다. 그래도 진시왕은 일찍 죽었습니다. 모든 에너지를 거기에 쏟아부은 까닭에 더 빨리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유튜브에 한 강아지가 여러 마리의 호랑이에게 젖을 먹여 키우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개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개가 되었습니다. 호랑이들이 성장해서도 그 강아지를 자기 어미라 여기기 때문에 그를 보호합니다. 그 개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다가가려면 수많은 그 둘레의 호랑이들과 맞서야만 합니다. 이때 강아지는 다른 개들에게 전혀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모든 에너지를 정말 강한 대상에게 쏟았기 때문에 얻는 보상입니다. 

위 이야기에서 죽어가는 남편과 그의 아내는 생존의 두려움을 병 나음으로 이겨내려 했습니다. 다행히 그들은 올바른 선택을 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심판관이 되셨습니다. 그들은 지옥에 가지 않게 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이 세상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화를 얻었습니다. 자신 안에 잉태된 호랑이를 키우려면 임신부처럼 세상에서는 가장 약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반대로 세상 것들에 의지하여 자기를 지키려 하다가는 내 안의 호랑이가 죽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몰방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믿음은 생기지 않습니다. 물 위까지 걸었던 베드로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다만 조금씩 젖을 줄 때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조금씩 더 평화로워짐을 느낍니다. 그러면 더 많이 투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9)라고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은 이 세상에서 작은 투자로 백 배의 보상을 받는 것으로 성장합니다. 한 번에 하느님의 보호를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마치 성모님 태중의 아기처럼 나의 희생을 먹고 자라십니다. 
저도 주일 학교 교리 봉사하고 성당에서 활동하면서 거기서 오는 평화 때문에 저의 전 생애를 바쳐도 되겠다는 믿음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나의 이 지상에서 두려움을 이기려고 원하는 것들을 포기하고 조금이라도 주님께 의지해 봅시다. 내가 포기하는 그것들이 내 안에 잉태된 하느님을 성장시키는 영양분이 됩니다. 죽음으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완전히 이기는 방법은 이 길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