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는 것과 들을 소리
류지인야고보 신부님(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새날이 시작됨을 알리는 새벽 수도원 종소리가 청명하 게 울려퍼집니다. 그러나 오늘은 시간을 꽤나 지체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늑장을 부린다면 아침 기도 시간에 늦을 것이 분명합니다. 얼굴의 물기를 닦을 시간 도 없이 허겁지겁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가까스로 지각은 면했으나 헐떡이는 숨소리가 다른 형제들의 잠심을 깨뜨 리고, 누르지 못한 머리의 까치집은 기도 시간 내내 저의 분심이 되고 말았습니다. 종소리에 담긴 부르심에 귀를 닫아버린 결과입니다. 귀는 언제나 열려 있기에 구조적으 로 소리를 거를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듣는 소리와 흘 려버리는 소리가 공존하는 현실을 보면 우리 영혼에는 모 름지기 각자의 귀마개를 두고 있는 모양입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인 신명기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이 스라엘아, 들어라!”(신명 6,4)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 이 지녀야 할 ‘들음’에 대한 연속된 가르침의 근간을 이루 고 있습니다. 그 배경에는 들어야 함을 알면서도 듣지 않 는 행실의 반복이 있고, “다시는 저희가 주 저희 하느님의 소리를 듣지 않게”(신명 18,16) 해달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청원에는 반대로, 벗어난 길에서 돌아오는 여정에서 체득 한 하느님을 향한 경외심과 신뢰의 회복이 담겨있습니다. 잘못 꿰어진 단추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발견되며 바 로잡는 과정은 시작점에서만 식별할 수 있습니다. 여기 에 끊이지 않고 반복되어 역사를 이루고 있는 단순한 가 르침이 발견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신명 18,15) 따라서 오늘 만나고 있는 이 가르침은 시간의 제약 을 뛰어넘어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도 유효하게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태초의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도 하느님의 말씀 뒤로 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과오로 영원한 생 명을 잃지 않았던가요?
복음에 등장하는 더러운 영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 라는 칭호를 구사하며 예수님의 움직임에 반응하고 있으 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1,24)라 며 하느님과 철저한 분리 노선을 취하고 있는 작태를 통 해 자신이 ‘들음’의 관점에서 완전하게 어긋나 있는 존재임 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제2독 서에서 대등하게 엮고 있는 ‘주님의 일이 아닌 세상일을 걱 정하는 것’과 ‘마음의 갈라짐’(1코린 7,33-34 참조)이 극치에 다 다른 모습입니다. 들음은 따름으로 이어지지만 듣지 않음 은 관계의 단절은 물론 존재의 상실을 초래합니다. 사람이 하느님께서 주신 생을 다하는 순간 가장 마지막까지 기능 하는 감각은 청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들을 수 있는 능 력이 하느님께 받은 선물임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일생 어 떠한 소리에 귀를 열어야 할지는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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