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기도방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님의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 (배경음)

松竹/김철이 2022. 11. 10. 00:14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님의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 (배경음)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oV03kwXKybo

 

 

 

(가톨릭)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의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

 

○ 아드님의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같은 민족끼리 피 흘리며 싸우던 시대에

착한 목자 이광재 티모테오를

보내 주심에 감사드리나이다.

 

● 그는 가난과 겸손과 순명의 정신으로

교회에 충실했고,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양들을 찾아 미사성제를 거행했으며,

기도와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었나이다.

 

○ 한국전쟁의 비극이 닥치기 전에는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사람들의 인도자였고,

전쟁 중에는 감옥에 갇힌 이들의 벗이었으며,

순교터에서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죽어가는 사람들의 마지막 봉사자였나이다.

 

◎ 이제 그분의 순교를 기리고,

이 땅에 또 다른 착한 목자들의 탄생을 기도하며,

사제 이광재 티모테오를 위해 간청하나이다.

하루 빨리 시복시성의

영광과 기쁨을 허락하여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2015. 8. 31. 춘천교구장 김운회 루카 주교 인준

 

* 이광재 신부는 1909년 6월 9일 강원도 이천군 낙양면 내락리

냉골에서 아버지 이 가브리엘과 어머니 김 수산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23년 신학교에 입학하여 1936년 사제 서품을 받고,

풍수원 성당 보좌 신부로 3년을 지냈다.

그 후 1939년 양양 본당 제3대 주임신부로 발령을 받아 부임하였다.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38선이 그어지면서 38선 이북에 위치한 양양에는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었고, 성당도 빼앗겨 신자집을 다니며 몰래 미사를

드렸고 이광재 신부의 사목 활동 범위는 평강과 원산까지 이르렀다.

신자들도 위협을 느껴 피신하라고 당부 드렸지만 이광재 신부는

“내가 돌보아야 할 신자가 38선 이북에 한 명도 없을 때 가겠다”며

남하하지 않았다.

이광재 신부는 함흥교구와 연길에 있던 성분도수녀원의 폐쇄로

피난하는 수녀들과 덕원 신학교의 신학생, 그리고 많은 신자들이

38선을 넘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양양 성당은 38선에 가장

가까운 성당 이므로 38선을 넘는 중요한 장소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1950년 5월 초 이광재 신부는 평강 본당 백응만 신부가 피랍되자

그곳 신자들을 돌보기 위해 성모 승천 대축일 전에 돌아오겠다며

북으로 떠났으나, 평강에서 공산당에 체포되어 원산 와우동 형무소

특별 감방에 3개월 간 수감되었다.

유엔군의 진군으로 후퇴하던 공산군은 1950년 10월 8일 밤 11시에

포로들을 한데 묶어서 산중턱 방공호로 끌고 갔다.

방공호 속에는 촛불과 총을 든 군인들이 있었고, 그들의 발 밑에는

방금 숨진 포로들의 처참한 모습이 보였다. 이광재 신부를 비롯한

포로들에게 놀랄 사이도 없이 시체 위에 엎드리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바로 총탄이 쏟아졌다. 얼마 후, 사람들 이 “살려 달라! 물 달라!”고 소리치는

가운데 응답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제가 가겠어요. 기다리세요. 제가 물을

드리겠어요” 라는 소리였다. 그 자리에 같이 있었으나 총을 맞지 않고

사지에서 살아남은 한준명 목사와 당시 평강고교 학생이었던 권혁기씨는,

“총을 맞아 사경을 헤매는 이광재 신부의 목소리였다”고 증언 하였다.

이광재 신부의 죽음을 본 한 목사는 “어떻게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온 정신을 집중하여 죽어가는 또 다른 이웃을 생각할 수 있을까?

가톨릭 신부는 위대하다”고 술회하였다. 유엔군이 북진하자 방공호에서

이광재 신부의 시신을 찾아 장례미사를 드린 후, 원산 성당 뒷산에 위치 한

성직자 묘지에 안장하였다. 이광재 신부는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자신의 사명 에 충실하였으며, 양들을 위하여 자기를 내놓은

착한 목자의 표상이다.

 

*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 약력

1909. 6. 9. 출생

1923. 9. 14. 용산 소신학교 입학

1930. 9. 14. 용산 성심대신학교 입학

1931.11.21. 삭발례

1932. 5. 21. 1, 2품 서품

1933. 6. 10. 3,4품 서품

1935. 6. 15. 5품 서품

1935.12. 21. 6품 서품

1936. 3. 28. 사제 서품

1936. 4. 9. 풍수원 성당 보좌

1937. 9. 28. 재속 프란치스코 제3회 입회, 서원 (수도명 : 안토니오)

1939. 7. 25. 양양 본당 주임

1950. 6. 24. 공산당에게 체포

1950.10. 9. 원산 와우동 방공호에서 순교

1950.10. 21. 원산 본당 성직자 묘지에 안장

 

//출처 : 양양성당성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