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길

주현미 - 고향소식(1943)

松竹/김철이 2022. 1. 27. 23:01

주현미 - 고향소식(1943)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x_vembrq3s4

 

 

 

 

 

 

노래 이야기

 

우리 대중가요사에서 가장 많이 불려지고, 사랑 받았던 노래들의 주제는

아마도 사랑고향일 겁니다. 그만큼 사랑이라는 감정과 고향과 고향에 계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의 감정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정서였고요. 그렇기 때문에 사랑 노래고향 노래는 모두

내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지면서 깊은 감동을 전해주었죠.

 

특히, ‘고향에 관한 노래가 많이 만들어진 시기는 우리 가요사에서

크게 둘로 나뉘는데요. 나라를 잃고 고향을 떠나 타지를 떠돌아야만 했던

일제 강점기. 그리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돈을 벌러 고향을 떠나 도시로 상경하는 젊은이들이 많았던 1960년대말부터 1970년대였습니다.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처연한 심정을 고향에 관한 노래를 듣고

부르면서 달랬던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는데요.

 

일제 강점기 시절. 나라를 잃고 유랑하는 민족의 아픔을 대변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상심에 빠진 대중의 마음을 위로하고 희망을 전해준 대표적인

가수는 바로 백년설선배님이었습니다. 백년설 선배님의 본명은 이갑룡이었는데요. 평소엔 이창민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고요.

1914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나서 성주농업학교 시절부터

문학에 심취했고, 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한때 은행원 생활을 하면서

여러 편의 시와 각본을 쓰기도 했죠.

 

그리고, 스물 셋의 나이에 에 재능이 있음을 인정받고, 콜럼비아사에

입사해 작사가 생활을 시작했는데요. 1938, 문학을 공부할 목적으로

일본에 유학을 갔다가 당시 태평레코드 문예부장이었던 박영호 선생님의 권유로 "유랑극단"이라는 노래를 취입하게 되는데요. 이때부터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백년설이라고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1939년 정월에 발표된 유랑극단은 기대 이상의 큰 성공을 거뒀고요.

문학청년이자 작사가였던 백년설 선배님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걷게 됩니다. 태평레코드사의 전속가수가 되면서 두견화 사랑

고향의 지평선’ ‘일자일루’ ‘마도로스 수기’ ‘북방여로등을 발표하는데,

이 노래들이 부르는 족족 모두 히트했지요.

 

1940년에 취입한 노래. 조경환 작사, 이재호 작곡의 나그네 설움

그 당시 10만 장을 넘는 앨범이 판매되면서 엄청난 사랑을 받는 국민가요가 되어 나라 잃고 고향을 잃은 우리 민족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는 명곡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일본경찰에서는 나그네 설움의 가사에 문제가 있다고 트집을 잡아서, 노래를 부른 백년설 선배님과 작사가 조경환 선생님은

일본경찰에 불려가서 험한 고초를 당했고요. 특히 작사가 조경환 선생님은 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기도 했죠. 그만큼 나그네 설움은 일본에게도 위협적일 만큼 우리나라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대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요.

 

번지없는 주막’ ‘어머님 사랑’ ‘3유랑극단’ ‘한잔에 한잔 사랑

눈물의 수박등같은 노래들이 연이어 히트하면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백년설 선배님은 오케레코드사에서 스카웃 제안을 받게 됩니다.

오케 레코드사의 전속가수가 되는 조건으로 입사 축하금 3천원과

전속 계약금 2천원에 월급 350원을 주는 조건이었는데요. 그 당시 천원이 현재의 돈 1억과 맞먹었으니까, 지금으로 치면 입사축하금 3억에

전속계약금 2, 월급이 35백만원이라는 엄청나게 파격적인 조건이었던 셈이죠. 그만큼 백년설 선배님의 인기가 그 당시에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데요. 그렇게 오케 전속가수로 옮긴 백년설 선배님은 이봉룡 선생님과 호흡을 맞추면서 아주까리 수첩’ ‘눈물의 수박등’ ‘고향설등을

불렀고, 이 노래들 모두 크게 히트했습니다. 백년설 선배님의 노래들이 모두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노래실력뿐만 아니라,

노래 속에 언제나 고향과 부모님과 그리움과 설움을 담아 노래했기

때문일 겁니다.

 

고향 소식역시 바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구구절절 담아 노래한곡인데요. 우리 가요 중에 드물게 울릉도가 등장하는 노래로, 고향이 울릉도인 사람이 향수에 젖어 울릉도를 오가는 뱃사공에게 고향소식을 묻는 내용의 가사를 조명암 선생님이 썼고, 그 가사에 이촌인 선생님이 곡을 쓰셨죠.

 

 

사공아 뱃사공아 울진 사람아

인사는 없다마는 말 물어 보자

울릉도 동백꽃이 피어 있더냐

정든 내 울타리에 정든 내 울타리에

새가 울더냐

 

사공아 뱃사공아 울진 사람아

초면에 염체없이 다시 묻는다

울릉도 집집마다 기가 섰더냐

정든 내 사람들은 정든 내 사람들은

태평하더냐

 

사공아 뱃사공아 울진 사람아

어느때에 울릉도로 배를 부리고

이렇다할 젊은 사람 나라 일 많아

환고향 못한다고 환고향 못 한다고

전하여다오

 

울진에서 울릉도로 떠나는 뱃사공에게 고향 울릉도의 근황을 물어보면서

동백꽃이 피었는지, 새가 우는지, 집집마다 깃발이 세워져 있는지,

고향의 풍경 하나하나를 그리워하는 마음 가득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라일 많아 고향에 가지 못하는 애틋한 마음을 노래한 아름다운 곡이고요. ‘고향소식은 역시 우리 민족의 향수를 달래주는 노래로 사랑받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 민족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달래주는 노래로 사랑 받았던

백년설 선배님이었지만, 일본경찰들은 이런 백년설 선배님의 엄청난 인기를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백년설 선배님의 인기를 이용하기 위해서 강제로 일본의 군국가요를

번안해서 부르게 했고, 일본군 부대와 육군병원에 위문공연을 하도록

강요했는데요. 이때의 활동을 친일행적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그 시대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요 받아야했던 비극적인 현실이었느냐에 관한 논란은 아직도 여전한데요. 그런 일련의 일들이 벌어진 이후, 일제총독부의 강압으로 레코드회사가 폐쇄되고, 노래할 기회를 잃어버린 백년설 선배님은 전국각지를 누비며 순회공연을 하며 해방을 맞았고요. 해방된 이후에는

무대에 서는 일보다는 고아원을 운영하고, 작곡가 작사가로서

더 많은 활동을 하게 됩니다.

 

가끔씩 가수와 노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운명의 끈으로 연결돼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1939유랑극단으로 데뷔한 이후,

백년설 선배님이 노래한 곡들은 모두 타관객지를 떠도는 유랑인들을 위한 노래였고요. 민족의 아픔에 함께 울며 위로하며 부른 노래들이었는데요.

그래서일까요? 그 옛날, 언제나 술 한잔 걸치시고나서 우리 아버지들이 왜 백년설 선배님의 노래들을 하염없이 부르셨는지

이제야 그 깊은 마음 속 그리움을 이해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