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 푸는 사람들
김철이
사람은 하루에 평균 128g 정도의 대변을 배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5년에 사람의 수가 73억 명 이상이니 지구상에서 사람은 하루에 적어도 90만 톤 이상의 대변을 방출하며, 1년이면 이 양은 3억 톤 이상이 된다.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이 순간에 지구에서는 1초에 인간의 대변이 10만 톤 이상씩 배출된다는데, 이처럼 사람에게 있어 먹는 일도 중요하지만, 배출하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똑바로 알고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개 조심’이라고 대문에 석필(石筆)로 갈지자처럼 삐뚤빼뚤 쓴 글씨, 빛바랜 붉고 푸른 기와지붕, 슬레이트 담장, 그리고 한길 쪽으로 조그만 쪽창이 나 있는 함석지붕에 덮인 반 평 남짓한 변소는 30~40여 년 전이면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던 친근한 풍경이다. 동네 어귀에서 “똥 퍼요! 똥 퍼!” 하고 똥지게를 진이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릴 양이면 남녀노소 누구나 손으로 코를 틀어막고 쏜살같이 지나가야 했던 그 시절의 똥이란 질 좋은 천연비료였고, 가끔 홍수가 나서 변소가 넘치면 온 집안 식구가 똥을 손에 묻히며 퍼냈던 친근한 표정들이었다. 똥 푸는 이들은 온종일 똥 한 짐을 퍼서 농부에게 가져다주면 농부는 그 값을 치러 주는데, 그 돈이면 처자식을 충분히 먹여 살릴 만했으며 똥 푸는 날이면 요즈음처럼 분뇨 수거 차량에 장착된 펌프 호수로 정결하게 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똥바가지로 푸세식 화장실 속 똥을 똥지게에 얹힌 똥장군에 퍼 담곤 했는데 이 과정에서 아무리 정교하게 처리한다 해도 어떤 악독한 악법으로도 처벌할 수 없는 똥 냄새만은 어쩔 수 없었다.
웃지 못할 이 사실을 뒷받침해줄 근거로 4050 시절 초에서 말까지 현재 부산 최고의 번화가로 뽐내는 연산동 안동네에서도 농사를 짓는 농가가 대부분이었는데 먹는 양이 일정하듯 배설하는 일 또한, 적지 않았던 시절 일정하니 농가에서 천연비료로 사용할 똥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 연산동 안동네 농부들은 똥지게를 지고 아랫동네인 철도관사로 내려와 가정마다 다니며 화장실 속 똥을 팔라고 애걸복걸했었다. 화장실을 한번 풀 양이면 온 집안뿐만 아니라 최소한 좌우 사방으로 열 집 사이를 건너다니며 진동하는 똥 냄새 때문에, 열흘은 더 코를 들지 못했으니 아무리 청결도 좋지만, 그 누가 화장실 손질을 자주 하려 들겠는가, 그 시절의 어른들은 똥냄새 탓에, 힘겨워하는 아이들을 달래려고 “애들아! 냄새가 아무리 지독하다 한들 뼛속에 베이지는 않지만, 사람의 세 치 혀로 불시에 유발되는 언어의 상처는 무형의 형체로 사람들 골수에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준단다.”라며 말에 관한 자녀들 훈도(薰陶)의 단어로 사용하곤 했다.
요사이 현대 사회 구조 속에 옛것들이 하나들 잊혀 가는 많은 소리가 있다. “찰칵찰칵! 엿이요. 울릉도 호박엿!” “뻔! 데기, 데기 뻔!~” “시계삽니다. 금이빨 삽니다. 채권삽니다.” “뻥이요!~” “칼 가소! 칼,” “머리카락 사요~ 머리카락!” “찹쌀떡~메밀묵!” 골목 안팎을 누비며 목청 높이던 여러 행상인(行商人)이 읊어내는 삶의 애환들이 있었다. 그중에 무엇보다 쉬 잊히지 않는 소리, “똥~~퍼!” 푸세식 변소(화장실)에 변이 넘쳐 똥장군을 지게에 지고 다니며 똥 푸는 사람들이 오기만을 기다릴 때 골목 어귀에서 “똥~~퍼” 하는 소리가 들릴 양이면 가뭄에 천둥 치는 소리를 들은 듯이 반가웠던 소리였다. 죄다 추억의 소리가 된 채 점차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멀리 물러나 앉겠지만, 7080시대를 함께 살았던 추억 살이 벗들이 다 가기 전에 자손들이 부모가 살아왔던 최소한의 흔적만이라도 기억하도록 배려하는 일도 후손에 대한 선조의 도리가 아닌가 싶다.
똥 푸는 직업을 지닌 아버지가 조금은 창피했던 영수는 동네 어귀에 아버지의 “똥~~퍼!” 하는 소리만 들릴 양이면 온 사지가 절로 움츠려들곤 하였다. 더욱이 학교 반 친구 정민은 영수 아버지의 똥 푸는 직업을 입에 올리며 영수를 가르쳐 “새끼 똥장군”이라며 놀려댈 땐 마냥 쥐구멍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억수 같은 비가 밤새 많이 내린 나머지 정민이네 집 푸세식 변소(화장실)가 온 마당으로 넘쳐 사방에 똥냄새로 진동시키며 난리 법석이 일자 영수는 속으로 고소해했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았던지 몰래 정민이네 집 대문 귀퉁이에 숨어 집안 동정을 살피던 영수는 자신의 부모님이 팔을 걷어붙인 채 똥 바다를 이룬 정민이네 집 넓은 마당을 쓸고 닦으며 도와주는 모습을 보았다.
이튿날 아침 학교엘 가니, 교실 안은 온통 똥냄새로 진동하였고 반 친구들은 하나같이 똥냄새가 난다며 슬금슬금 정민을 피하기 일쑤였는데, 영수만은 아무런 말없이 조용히 정민이 옆자리에 앉으면서 “헤헤~ 오늘은 내가 네 짝꿍이다.” “야! 저리 가! 네 자린 저쪽이잖아” “누가 앉고 싶어 앉냐! 내가 아니면 누가, 네 옆에 앉냐?” 이 이야기는 한 장면의 우화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6070시대 바탕으로 쓴 실화인데 똥이 맺어준 우정이니만큼 영수와 정민의 우정은 똥통 우정이라 똥통을 사이좋게 들고 가는 두 아이의 표정이 마냥 정겹기만 했다.
못 먹고 못살던 똥통에 얽힌 사연이 어찌 이뿐이랴. 내 백형(伯兄)은 1962년 3월 9일: 개교한 연산초등학교 1회 졸업생인데 같은 해 10월 29일에 양정초등학교 교사(校舍)에서 연산동의 현 교사(校舍)로 이전하였다. 그 시절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형님은 절친 중에 연산동 안동네가 집이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부친이 속된 말로 흔히 말하는 똥 푸는 사람이었다. 편견이 사람 잡는다. 는 말에 걸맞게 형님의 절친은 아비가 똥 푸는 직업을 지녔다 하여 친구들의 따돌림을 한 몸에 받았다. 형님은 그러는 친구가 안쓰러워서 여느 친구들보다 몇 걸음 가깝게 다가갔으며 학교를 파하면 곧장 그 친구를 데리고 우리 집으로 와서 놀다가 가곤 했는데 하루는 형님과 그 친구가 현관문을 들어서자 때마침 군 생활하셨던 중부(仲父)의 장기 휴가로 집에 와있던 사촌 누이동생이 아무런 생각 없이 “아이~ 똥 냄새” 멈칫 형님의 친구는 문을 들어서려다 말고 자신의 몸에다 코를 갔다 대고 냄새를 맡았으며 형님은 얼른 친구를 막아서며 “아냐, 네게서 나는 거” 그때 어머니 하시는 말씀 “돌이 말이 맞아, 오늘 우리 집 변소 펐거든. 아마 그 냄새가 덜 빠져 우리 설애가 그런 말을 했을 거야.” 결국, 똥냄새의 원산지는 낮에 펐던 화장실에서 도망쳐 나와 집 안팎 이곳저곳에 숨어있던 똥냄새 패잔병들이었고 짧은 코미디 같은 그날의 일로 형님의 절친은 부친의 직업 탓에, 마음의 작은 상처를 받았을 터이다.
그 일 이후 겉 표현은 하지 않아도 절친에게 미안했던지 그 시절 형님은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지 않고 집과 학교의 거리가 746m에 시간이 15분이 걸렸는데 학교 점심시간만 되면 똥 푸는 일을 생업으로 지닌 이의 아들인 절친의 손을 잡아끌며 턱에 숨이 찰 정도로 뛰어 집으로 와 점심밥을 먹고 가곤 했는데 이러한 행적이 5학년 2학기 말에서 졸업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훗날 성인이 되었을 때 그때의 일을 돌이켜 회상하며 형제가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터뜨렸다.
옛날에 한 청년이 살았는데 이 청년이 어찌나 부지런하고 착실한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하지만 청년은 갑자기 불치병에 걸렸다. 날이 갈수록 청년의 몸이 쇠해져만 갔다. 조선 팔도 좋다는 음식은 죄다 구해 먹이고, 용하다는 무당을 불러 굿도 해보고, 전국 팔도에서 제일 진맥을 잘 집는다는 의원도 불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날이 가고 시간이 흐를수록 청년의 몸은 더욱 쇠약해갔다.
“아이고, 내 팔자야. 명도 얼마 없는데 이래 누워만 있다가 내 청춘 다 보내겠다.” 어느 날 매한가지로 누워 있는데 똥 푸는 사람이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총각! 이 집은 똥 안 풀 건가?” 청년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불치병에 걸려 골골거리는데 똥 푸는 사람은 남의 똥이나 푸는 천한 일을 하면서도 아픈 기색이 하나도 없이 즐겁게 일하니 청년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아니 저 사람은 남의 똥이나 치우는 더러운 일을 하면서도 어찌 저리도 건강하고 신이 난담?’ 그랬건 말았건 똥 푸는 자는 똥장군을 지고 뒷간으로 들어가 분주히 똥을 펐다. 얼굴은 똥에 절었지만, 어찌나 건강한지 살결에서 반짝반짝 윤이 날 정도였다. 청년은 볼수록 기가 막힌 일이었다.
청년은 똥 푸는 사람을 보면서 도저히 그 이치를 알 수가 없었다. 오히려 아픈 저 자신이 원망스럽고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청년은 똥 푸는 자에게 그 이치를 물어보기로 했다. “저~ 말씀 하나만 물어봅시다. 아니 당신은 어찌 그리 건강하오?” 똥 푸는 자 대답하기를 “속이 병드니 몸이 병드는 법입니다.” 똥 푸는 사람은 원 가운뎃점이 찍힌 종이와 원 밖에 점이 찍힌 종이를 청년에게 주며, “원 밖에 점이 찍힌 종이는 태워버리고, 원 가운뎃점이 찍힌 종이는 베개 밑에 넣어두고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병이 나을 겁니다." 청년은 속으로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똥 푸는 사람의 말을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숨 푹 자고 일어나니, 청년은 이전과 같이 건강한 몸을 되찾았다. 게다가 청년은 하는 일마다 술술 잘 풀려서 장수를 누리며 잘 먹고, 잘 살다가 타고난 명에 다다라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설화 풀이는 ‘자존’이 없어 마음의 병이 걸린 총각이, 밖에서 중심을 잡는 것이 아닌 내 안에서 중심을 잡고(원 가운뎃점이 찍힌 종이) 병을 극복한다는 내용인데 세상을 살면서 자존감을 높이지 못한 자가 반성도 해보는 계기로 삼으며 우월감은 열등감에 반(反)해서 오는 것으로 누구 하나 잘난 사람도 없고 못난 사람도 없으니, 똥 푸는 이의 몸가짐으로 누가 더 잘 낫고 못 낫고를 따지며 살지 말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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