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꿀샘

전삼용 요셉 신부님|2021 12 26/ 성가정의 성인식: 자녀에게 자유가 주어지고 부모의 책임이 끝나는 순간/ 예수,마리아,요셉의 성가정 축일

松竹/김철이 2021. 12. 25. 18:44

2021 12 26/ 성가정의 성인식: 자녀에게 자유가 주어지고 부모의 책임이 끝나는 순간/ 예수,마리아,요셉의 성가정 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5JfSqvMBH-Q

 

 

 

 

 

 

2021년 다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성가정의 성인식: 자녀에게 자유가 주어지고 부모의 책임도 끝나는 순간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모의 말을 안 듣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내용으로 나옵니다.

 

부모는 자녀가 자신들과 동행하지 않는 것을 하루 동안이나 모르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하루라는 시간은 지금 서울에서 부산을 왕복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부모가 그 긴 시간 동안 아들이 사라진 것을 몰랐는데 어떻게 자녀에게 그렇게 관심이 없는 가정을 거룩한 가정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또 아들도 사흘 동안이나 자신을 찾아다닌 부모에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이 정상적인 모습일까요?

그렇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관심을 끊고 자녀는 부모의 뜻에 관심을 끊는 것, 그것이 12살 때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성가정 가정교육의 가장 중요한 배울 점입니다.

 

지금은 명작 반열에 든 흐르는 강물처럼’(1992)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몬태나 출신의 전 시카고 대학교수며 시인이자 작가인 노먼 매클레인이 70세가 넘어 쓴 자신의 자서전을 로버트 레드포드가 감독한 영화입니다.

 

노 교수는 나이가 들었음에도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을 던집니다.

내 동생은 왜 죽었을까?’

노먼의 아버지는 교회 목사입니다. 어머니는 매우 순종적이고 노먼도 아버지의 교육에 순종적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이렇게 교육했습니다.

장로교 목사였던 아버지는 인간은 본래 사악한 존재로 구원이나 송어처럼 좋은 것들은 은총으로 얻어지는 것이며 은총은 예술을 통해 얻어지는데 그것은 절대 쉽지 않다.”

여기서 예술은 반복되는 끊임없는 수련을 의미합니다. 영화에서 이 수련은 송어를 잡기 위해 낚시법을 수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노먼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직접 가르칩니다. 그리고 절제된 글이 나오게 하려고 계속 반으로 줄이라고 합니다.

노먼은 싫은 기색이 역력하지만, 은총은 예술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기에 차마 거부하지 못하고 그대로 따릅니다.

겨우 아버지의 검열을 통과한 노먼은 아버지가 잘했다. 이젠 버려도 돼!”라는 허락이 떨어지자 작문을 꾸겨 휴지통에 버리고 기다리던 동생 폴과 함께 낚시하러 뛰어나갑니다.

 

여기서 느닷없는 장면이 나옵니다.

동생 폴이 밥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폴이 밥을 먹지 않으면 마지막 감사기도를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말합니다.

신은 수천 년 동안 우리에게 오트밀을 주셨고, 어린아이가 그 법칙을 깰 수는 없다.”

 

노먼은 여기서부터 어쩌면 동생의 죽음이 아버지의 탓은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폴은 오트밀이 먹기 싫어서가 아니라 왼손잡이로 태어났는데 오른손을 쓰라고 하는 것에서 저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어느 손이더냐?”라고 묻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왼쪽은 나쁜 쪽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이 오른손을 쓰기를 원했습니다.

 

폴은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노먼에 비해 더 자유로운 아이였습니다. 낚시할 때도 아버지의 리듬을 깨고 자신만의 독특한 숭어잡이 리듬을 개발하여 서서히 아버지의 규칙에서 벗어납니다. 노먼이 아버지와 같은 목사가 되려 하고 폴은 그런 직업은 없다는 형의 말에도 불구하고 전문 낚시꾼이 되려는 것에서도 이런 차이가 잘 나타납니다.

 

노먼은 결국 아버지의 곁을 떠나 먼 곳에서 대학을 다니고 대학교수가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규칙을 깨고 싶었던 폴은 고향 근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내 도박에 빠져 죽음까지 맞이합니다. 아버지는 폴의 죽음을 태연하게 받아들입니다. 마치 잘못된 작문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처럼. 죽은 폴은 손의 뼈가 부서져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왼손을 쓰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버지의 이 마지막 설교는 어쩌면 폴의 죽음에 대한 핑계처럼 들립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도와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 모를 수도 있고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 우리 손에서 벗어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들을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벽하게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내가 자녀를 잘 키우지 못해도 그래도 완벽하게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키울 능력도 사랑할 능력도 없습니다. 모든 능력과 사랑은 배우는 것이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자녀가 흐르는 강물처럼 순리대로 주님께 흘러가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뿐입니다.

내가 그 길을 막으면 자녀는 부모에게 사로잡힙니다.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아이는 마셔야 하는 물이 아니라 흐르게 해야 할 강입니다.

 

이런 면에서 유대인들은 아주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인식입니다. 성인식의 가장 중요한 관문 중의 하나는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인식을 위해 글을 배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을 줄 안다면 이제 부모의 책임은 끝난 것입니다. 모세오경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이 증명되면 부모는 이렇게 화답합니다.

이 아이에 대한 책임을 면하게 해주신 하느님께 축복이 있기를!”

 

물론 그 뒤로 1년 동안 성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을 더 배워나가기는 하지만 부모는 성인식을 끝내면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강물을 강물로 흐르게 내버려 둔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에 이제 자녀를 맡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의 아버지는 자녀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두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방향으로 훈련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라 여겼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으면서도 집에 돌아가서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몸도 지혜도 성장했다고 합니다.

 

성인식을 마쳤다면 이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계명 때문에 부모를 사랑하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어른들도 나이가 들어서 자녀를 낳아보고 부모를 더 사랑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성장입니다. 인생의 흐름과 삶의 이치에 자신을 맡기면 더욱 성장하지만, 부모가 잡아놓으면 부모의 그릇 밖으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가정이 성가정이 되기 위해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되새길 수 있는 중요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