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그리하여 다른 마을로 갔다|윤원진 비안네 신부님

松竹/김철이 2021. 9. 28. 08:37

그리하여 다른 마을로 갔다

 

                                                             윤원진 비안네 신부님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알아보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사마리아인들은 자신에게 찾아온 좋은 기회를 놓쳤다.

그분께서 사마리아에 오셨지만 맞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어쩌다 그 귀한 축복을 던져버린 것일까.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있었을 때 남쪽, 곧 남유다는 적의 공격에 패망했고 적국으로 끌려갔었다.

이후 북쪽, 즉 북이스라엘도 무너졌는데 적국은 자신들의 국민을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에 데려다 살게 했다.

선택받은 유일한 민족이라는 것에 자긍심이 강했던 이스라엘이 혼혈이 되어버린 것이다.

시간이 흘러 남유다인들, 즉 예루살렘 사람들이 귀양을 마치고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려 했을 때 사마리아인들이 함께 하려 했지만 그들은 도움을 거절했었다.

그러한 과거가 쌓이고 쌓이며 서로간에 앙금이 깊어진 것이다.

 

하지만 사마리아가 예루살렘을 싫어한다고 해서 예수님까지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 친하다고 해서 좋아하는 사람을 멀리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실수를 많이 한다.

어떤 사람을 '그 사람'으로 보지 않고 다른 사람과 연관 지어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 엄마는 예전부터 '원진이 엄마'로 불리는 것이 싫다고 했었다.

엄마에게도 이름이 있는데 아들과 연관지은 호칭을 듣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도 '신부님의 어머님'이라는 말을 그리 반가워하지 않는 듯하다.

엄마를 있는 그대로의 80세가 가까운 할머니로 보지 않고 신부님과 관련지어 생각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일까.

 

'나'라는 사람과 '내가 가진 직책'을 동일시하면 그 직책이 사라졌을 때 마치 '나'를 잃은 듯 힘겹게 된다.

'나'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존재인데, 존재의 본질을 외부적 가치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흐르는 강물을 붙잡는 것처럼 허무하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에게 예수님이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자신들이 싫어하는 사람을 찾아가려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예수님을 예수님으로만 보지 않고 예루살렘과 연관 지어 살폈기 때문에 자신에게 찾아온 큰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노여워하시거나 벌을 내리지 않으셨다.

성질 급한 야고보와 요한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 불살라 버리겠다'라고 했지만 꾸짖으신 것이다.

사실 혼나야 할 사람들은 사마리아인이었는데 그들에게 화를 낸 두 형제가 질책을 받았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분께서는 자신을 거부한 사람에게 분노하시거나 거절당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기회를 놓친 것 자체가 그들의 슬픔이었기 때문일까.

진짜를 알아볼 눈이 없는 이들에게 애정을 강요할 수는 없는가 보다.

 

결국 그분께서는 '다른 마을'로 가셨다.

자신을 밀쳐내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면 '다른 길'을 택하면 되는 것이다.

'나의 가치를 왜 못 알아보느냐', '내가 무엇이 부족하냐'라고 불같은 분노로 자신을 태우기보다는 그분의 방법이 현명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그날까지,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 거절당하시고 거부당하셨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신' 것은 거부당할 것을 미리 아시고 이에 마음 쓰지 않기로 스스로를 단단하게 하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나도 거절당하는 것이 싫다.

그래서 '나'라는 본질에 수많은 포장을 덧씌워 내가 가진 직책과 경력과 능력들을 과대 포장한다.

그리고 거절당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마음과 관심을 거둬버린다. 오래전에 거절당했던 기억이 여전히 아프기 때문일까.

마치 사마리아인들이 과거에 거절당했던 상처 때문에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만일 사마리아인들이 '당신에 앞서 보내신 심부름꾼'들에게 이렇게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지난 시절에 자신을 아프게 했던 사람들을 '나쁜 사람'이나 '모자란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축복에 앞서 준비시키는 사람'으로 여겼더라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저는 거절당했던 때가 많아 거부당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내가 준 마음이 땅에 떨어져 그의 마음에 씨 뿌리지 못하고
나의 관심이 부담으로 이해되어 
주고 싶었던 호의만큼 나를 태우는 후회의 불이 될까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지난 아픔과 오늘의 축복을 달리 보게 해 주십시오.
오늘의 그 사람은 저를 거부했던 그 사람이 아니라
새롭게 보내주신 심부름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오늘을 처음 맞은 새 날로 여기고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연관지어 판단하지 않게 하시며
거절당했을 때 털고 일어나 다른 길을 찾을 굳센 마음을 주소서.

이제는 불타버린 잿더미에서
희망의 불씨를 찾을 때가 되었음을 깨닫게 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