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윤원진 비안네 신부님
기분은 습관이 되기 쉽고, 습관은 성격이 되기 쉽다.
심리학에서는 성격을 '개인의 안정적인 생활양식'으로 정의한다. 다시 말해 성격이란 비슷한 상황에 놓이면 비슷한 행동을 하는 행동유형, 곧 생활의 패턴(pattern)인 것이다.
화를 내는 사람은 유형, 곧 패턴이 있다. 늘 비슷한 상황이 되면 화가 나고, 비슷한 사람에게 화를 낸다.
기쁨도 패턴이 있어서 비슷한 상황에서 기분좋아 하고, 비슷한 사람에게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런데 분노도 기쁨도 사실은 감정이다. 감정이 외부개체, 즉 상황이나 사람을 만나 행동이 되고, 일정한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 성격인 것이다. 이를 '성격 유형론'이라 한다.(난데없는 심리학 강의가 되었다)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앞서 말한 성격유형론에 따르면 싸움은 분노에서 오고 쉽게 분노하는 성격이 있는 것이니, 싸움과 다툼은 '성격'이 원인이다. 곧 싸움을 자주 하고 다툼이 잦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성격을 갖게 된 원인을 성격유형론에서 찾아보면 '늘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는 습관'이라 할 수 있다.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화를 내는 '버릇'이 생긴 것이고 싸움이나 다툴만한 일이 아닌데도 '습관'처럼 이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싸움과 다툼의 습관이자 버릇이 '어릴 적 경험'(아동기 감정양식)에서 온다고 말하는 사람은 '프로이트'이다. 어릴 적 부모가 자주 화를 내었거나, 양육자와 대화가 잘 되지 않아 어린아이가 화를 내거나 울며 보채야만 요구사항이 수용되었다면 이러한 경험이 '내재화'되어 성격으로 굳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반면 아들러는 '열등감'때문이라고 하였다. 화를 않으면 무시당할 것만 같고, 다툼을 통해서만 자신의 능력과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싸움과 다툼이 잦다. 즉 분노는 열등감을 회복하기 위한 방법인 것인데, 주위 사람들로부터는 인정을 받아야 하므로, 다시 만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나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 혹은 자신에게 화를 낼 수 없는 사람에게 쉽게 분노한다. 식당 종업원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운전만 하면 화를 내는 사람이 이런 경우인 것이다. (심리학 논문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싸움과 다툼의 원인이 '욕정'때문이라고 한다.
(싸움과 다툼은)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욕정'의 원문은 ἡδονή [해도네]이다. '해도네'는 사실 욕정이라기보다는 '쾌락'에 가깝다. 잠시의 즐거움, 후회가 더 큰 만족, 불의한 기쁨이라 할 수 있겠다. 야고보 사도는 이 '해도네'가 싸움과 다툼의 원인이라 하는데 이를 성격유형론과 연결하면, 화를 냈을 때의 짧은 만족감이 반복되면서 성격이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화를 냈을 때 내 요구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해도네'를 느낀 것이고 이를 반복하는 것이다. 아들러에 의하면 열등감을 느낄 때 화를 내면 '해도네'를 느끼며 열등감이 해소되므로 자꾸 화를 내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견해로는 '대상 관계론'이 있는데, 이는 '대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이 '조건부', 즉 '내가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사랑해주겠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랑을 못 받을지도 몰라...'라는 명제가 반복되다 성격이 되는데, '사랑받기 위해서는 완벽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완벽해져야 하는 것처럼 남도 완벽해야 하므로, 타인의 작은 실수나 단점을 보면 지나치게 분개하고 화를 내게 된다.
나는 오늘도 운전하다 화를 내고 말았다.
나는 느리게 가면서 1차로로 가는 차의 뒤를 따라갈 때면 늘 화를 낸다.
오늘은 엄마와 모처럼의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었는데
앞차가 느리게 가자 추월을 하려고 했지만 옆차로에 차가 있어서 앞지르지 못해 화가 났다.
그래서 쌍라이트를 번쩍이다 추월할 수 있게 되자
쌩하고 달려서 느리게 가는 그 차를 앞질렀다.
옆에 탄 엄마는 나의 운전이 불안했을 것이다.
나도 앞지르고 나서야 뒷차를 보며 보복하지 않는지 살폈지만
화가 났을 때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이런 행동들을 반복한다. 어느새 나의 성격이 되어버린 것일까.
이는 내가 어릴 적 엄마의 분노를 많이 경험한 탓일까, 나의 열등감이 내가 신부인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폭발한 것일까. 나의 완벽주의적 기질이 1차로 정주행 차량에게 드러난 것일까.
많은 후회를 반복하면서도 또다시 화를 내고 주위 사람을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들며 큰 사고를 야기할 수 있는 일인데도 나는 왜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
야고보 사도는 이를 '해도네'라 하였다.
화를 냈을 때의 짧은 쾌락, 만족감에 중독되어 그 작은 기쁨을 위해 큰 후회를 느끼는 것이다.
1 독서인 지혜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분노의 원인을 남에게만 돌리는 전형적인 예이다.
'앞차가 느리게 가니까 내가 화가 난 것이다'라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는 것이다.
앞차는 나의 주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내 기분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나 스스로 앞차에게 주인의 권한을 준 것이고, 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 채 그 기분이 주는 쾌락을 우상삼아 끊지 못하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앞으로는 느리게 가는 차의 뒤를 쫓아갈 때 그 차를 '어린이'로 여겨야겠다.
어린이가 아장아장 걷는 것을 보며 화를 내지 않는 것처럼 그 사람도 늦게 가는 것이 아니라 빨리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화가 날 때면 그 사람을 '어린이'로 보아야겠다.
그 사람 속의 '어린 아이'가 내 눈에 보인다면 나는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내 속의 '어린아이'를 다독이는 것이 될 테니 말이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부모의 화내는 습관을 내가 받은 것이라면, 부모가 화냈을 때 무서웠던 내 안의 어린아이를 달래주어야겠다.
아들러의 말처럼 열등감이 폭발해서 화가 나는 것이라면, 내 안의 어린 아이를 어루만져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게 해 주어야겠다.
대상관계 이론에 따라 완벽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완벽하지 않은 사람을 위로하며 내 안의 어린아이를 보듬어야겠다.
1 독서인 지혜서가 크게 와닿는다.
위에서 오는 지혜는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합니다.
내 안에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의 열매가 가득해지게 하소서.
타인 안에 숨은 어린이를 발견하여 내 안에 상처 받고 겁 많은 어린아이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나의 기분이 습관이 되지 않게 하시고, 이 습관이 성격이 되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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