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松竹/김철이 2021. 3. 3. 09:54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2천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수난과 고통의 십자가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말하며 행복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우리가 기억하는 주님의 모습은 고통이며, 사순절에는 배로 늘어나는 느낌도 받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실 때 그분 주변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말하는 보편의 삶 속에 사람들이 한 사람을 찾아 나설 때 그가 고통받는 사람이라면 누가 그를 보러 나서겠습니까? 사흘을 굶어가며 이야기를 듣고 그를 만나 따라다니는 일은 그것이 누군가의 고통과 수난이라면 단순히 구경을 위해서도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고통으로 기억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어쩌면 주님의 공생활 전체를 보는데 실패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오늘 예수님과의 삶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 하나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시간을 목격했던 야고보 형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며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이야기에 주님 앞에 나온 이들이 있었으니 그 형제들과 어머니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오른쪽과 왼쪽 자리를 원합니다. 그들의 이런 청은 다른 제자들의 질투와 시기를 불러 일으킵니다.

 

주님은 당신이 가실 길에 대한 말씀을 멈추셔야했고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제자들은 자신있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의 대답에 주님의 죽음이 있었을까요? 그들은 주님의 능력을 보아왔고 그 능력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발휘되는지를 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의 길이란 아마도 죽음을 예상하거나 각오하는 삶은 아니었을 겁니다. 주님의 실제 죽음의 날 그들이 모두 흩어진 것은 그 때문이었고 그 바로 전날 그들은 만찬 후 즐겁게 주님과 함께 걸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겐 주님에게 내려진 세상의 결론인 수난과 고통이 훤하게 보이지만 그들에게 주님의 일상과 하루는 하느님 영광 안에서의 삶의 가치였을 겁니다. 자리와 상관 없는 가진 것과도 상관 없는 하느님 백성의 삶이란 이런 것이라는 것.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우리는 결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기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었고 제자들이 짐작한 영광의 날도 이 삶의 끝에 찾아오리라 생각했을 겁니다. 

 

 

주님의 길을 따르는 주님은 수난의 모습으로 우리를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 고통이라는 생각은 접어두셔도 됩니다. 오히려 말도 안되는 행복을 누리는 이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의 특징입니다.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고 서로를 아끼고 함께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은 여전히 본보기로 삼을 만한 수고와 걱정거리. 더 나아가서 위협을 가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포기할 수 없는 그 기쁨과 행복 때문에 목숨을 걸고 또 잃기도 합니다.

 

어리석은 제자들은 그 끝을 모르고 약속을 합니다. 우리는 그 끝에 놓인 수난도 십자가도 다 압니다. 그럼에도 그 잔을 우리도 마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알면서도 걸어가는 삶. 그 끝은 수난과 고통이 될 수도 십자가가 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모든 여정은 기쁨의 길이고, 그 열매도 부활의 영광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