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松竹/김철이 2021. 2. 5. 17:08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봅니다. 세상 가장 어이 없는 죽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어쩌면 가장 현실에 가까운 한 사람의 죽음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사람의 죽음은 그가 유명한 사람일수록 어떤 의미를 붙이는 것에 익숙합니다. 물론 세례자 요한의 죽음도 하느님의 뜻을 지키고 전하다 죽었다고 말하지만 복음 속 사건은 "목숨을 걸고"라는 표현이 어색한 죽음입니다. 

 

그가 감옥에 갇힌 것은 바른 말을 했기 때문이지만 그것은 헤로데가 요한을 잠시 붙잡아 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헤로데는 결코 요한을 죽일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것은 그에게 죽음의 결정을 내리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목숨을 노리고 요구한 것은 헤로디아였지만 그녀도 요한을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바로 헤로데가 그를 지켜주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이 죽었을 때 그 결정은 헤로데가 하게 되었고, 그것을 요청한 것은 헤로디아의 어린 딸이었으며 그 몫은 왕을 기쁘게 한 것과 바꾼 가치였습니다. 

 

한 사람의 즐거움과 그 즐거움에 걸었던 자신의 약속에 무게, 곧 자존심 때문에 시대의 한 예언자, 그리고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은 허망하게 감옥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우리가 의도하지 않는 이유로 우리가 아끼는 가치들이 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우리에게 놓쳐서는 안되는 불편한 기준들도 있습니다. 그나마 하느님 곁에 머무는 선으로 여기던 것들. 나를 불편하게 하지만 꼭 지켜야 할 것들이 사라지는 것은 그 역시 나를 위한 것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으면 좋았을거라 위안해보지만 언젠가 우리는 그것을 그리워하고 내가 하느님을 믿고 따르며 열심히 살았던 때를 찾게 됩니다. 그것은 내가 선택해서 가진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옳기 때문에 지켰던 것이니까요. 우리에게 하느님은 어느 때보다 믿기 힘든 분이 되었습니다. 성당을 다니고 미사에 참례하고 있지만 우리는 사소한 이유로도 한 번쯤 빠질 수도 또 일상에서는 아예 잊고 살아갈 수도 있다고 여기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요. 

 

헤로데가 차라리 악했다면 그 소녀가 자신이 청해야 할 몫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았다면 요한의 목소리는 좀 더 세상에 울려 퍼졌을 것입니다. 헤로데가 결국 요한으로 인해 좋은 지도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약함과 어리석음은 나약함과 상관 없는 큰 잘못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런 우리의 약함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지금도 우리에겐 이런 약함이 가득하니 회개를 꿈꾸지만 우선 이것부터 생각해보고 방향을 돌렸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