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라면
김철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한 생애를 사노라면 웃을 날도 있고 울 날도 있다. 물론 태어날 때는 누구나 울면서 태어난다고 하더라만. 십여 년 전 선종하시고 지금은 그 인자하신 모습을 뵐 수는 없지만, 가톨릭 부산교구에 소속돼 계셨던 노 사제 한 분이 계셨는데 그 사제는 입가에 웃음이 떠날 날이 없었다. 그 사제는 공식 자석이든 비공식 자석이든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여니 사람은 세상에 태어날 때 죄다 울면서 태어난다고들 하는데 당신은 어머니께 전해 듣기로는 배에서 나올 때부터 웃으면서 태어났다고 말이다. 그 사제는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늘 웃으며 말씀하셨다. 당신은 아무리 슬픈 일을 맞이해도 울기는커녕 슬픈 표정을 지을 수가 없다고 하셨다.
그 노 사제는 평생을 시야로 볼 수 없는 외길 사제의 길을 묵묵히 걸으며 높은 자보다 낮은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많이 가진 자보다 적게 가진 자들과 말을 섞어 대화하기를 즐기셨다. 그분은 사람들이 살아내야 할 인생살이를 사계절 나뭇잎에 비유하셨다. 봄에 돋는 연초록 어린 나뭇잎을 인생의 새싹이 막 움트기 시작하는 유아기와 유년기에. 여름에 가지마다 무성하게 달리는 나뭇잎을 세상 만물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만큼의 의욕을 지닌 청년기에. 가을에 온통 곱게 물들어갈 나뭇잎을 한 인생살이를 추수하고 거두어들일 장년에. 겨울에 퇴색되어 이듬해를 준비하는 나뭇잎을 좋든 싫든 당사자에게 주어진 인생살이를 정리하는 노년기에 비유하곤 했는데 당신은 개인적으로 사계 중 가을을 가장 좋아한다고 하셨다. 봄철에 연초록으로 돋아난 나뭇잎이 이듬해 대지를 살찌우게 할 몇 점 토양으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 누렇게 퇴색돼 가는 낙엽의 생을 닮고 싶어서라고 말씀하시며 한낱 나뭇잎에 불과하지만, 낙엽의 생애를 묵상하면 그 옛날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하찮게 여기며 신앙을 지켜온 순교자들을 보는듯하여 나뭇잎들의 생을 닮고 싶다고 말이다.
노 사제는 살아생전 개인적으로 소망이 있다고 하셨는데 될 수만 있다면 당신은 낙엽처럼 살다가 낙엽처럼 떠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죄다 하나같이 꽃들의 화려함에 쉽게 매려 되지만 그 그늘에 묻혀버린 나뭇잎의 진정한 아름다운 생애는 찾아내지 못한다며 당신은 곱게 물든 낙엽의 생을 닮고 싶다 하셨다. 갖가지 화려한 꽃들의 그늘에서 피고 지는 희생적 삶을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낙엽을 닮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해야 할 사제의 길을 걸어야 할 당신이 언제나 한결같이 타인에게 희생적 봉사의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과 만약 그 반대의 삶을 살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에서 곱게 물들어갈 낙엽을 닮고 싶다는 것이었다.
노 사제의 말을 듣자면 빛깔만 곱게 물든 나뭇잎이라 하여 다 같은 낙엽이라 부르면 잘못된 표현이라 하셨다. 두 계절을 줄 곳 푸르게 살다가 한 계절은 고운 빛깔로 퇴색돼 가는 낙엽 중에서도 정말 곱게 물들어 이듬해 토양이 되는 고엽(枯葉)이 있는가 하면 겉으로는 어느 나뭇잎들보다 곱게 물들어 보여도 속을 들여다보면 이듬해 토양과는 전혀 무관한 가엽(假葉)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실은 사제들의 삶뿐만 아니라 일반 여느 사람들의 삶에도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노 사제는 이미 고인이 되었고 사제가 이듬해 토양이 될 만한 참 사제의 삶을 살다 가셨으며 노 사제가 머물기를 소망하셨던 그곳에 머물고 계신지는 모를 일이지만 이맘때만 되면 노 사제가 살아생전 어느 해 가을 내게 해주셨던 말씀이 귓전을 맴돈다. 노 사제가 내게 일러주셨던 인생 교훈은 사람이 각자에게 주어진 한평생의 인생을 사는 동안 숱한 인생 역경의 파노라마가 썰물과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밀려가지만, 인생살이에는 표본도 진리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흔히 사람들은 누군가 모범적인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을 표본으로 삼아 그 사람의 인생 좌우명을 본받기를 원하며 그 사람의 인생 좌우명이 인생살이에 있어 진리인 것처럼 말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길고 짧은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한평생의 인생살이를 의무적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누구는 잘살았고 누구는 못 살았다고 단정 지을 수가 없을 거라는 것이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도 생김새뿐만 아니라 성격 차이도 나는 법인데 하물며 가문도 다르고 부모도 달리 태어난 사람들이 모범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하여 어떻게 그 사람을 닮는다는 것인지 크나큰 오산이자 인생살이 설정에 엄청난 차질을 가져다줄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노 사제의 마무리 언급에 의하면 사람이 한평생을 사노라면 해 뜰 날도 있고 비 오는 날도 있듯이 기쁨과 행복으로 환희에 찬 날도 있을 것이고 근심·걱정에 휩싸여 온 세상이 종말이 올 것만 같은 날도 있을 것인데 기쁨에 벅찼던 날도 세상 끝 날을 맞이한 듯이 슬픔과 실의에 빠졌던 날도 반드시 시간은 흘러가고 사람은 누구나 예비 치매 환자라서 점차 잊혀 가기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노 사제의 이러한 인생 지론이 평생 장애라는 멍에를 진 채 살아가야 할 내게는 더없이 좋은 보약이 되었고 노 사제의 바보스러운 미소를 본받으려 지금, 이 순간에도 갖은 노력 중이다. 주옥같은 가을 노래는 심금을 울려 마음의 발걸음은 한달음에 고았던 추억의 시절로 달려가지만, 영원할 것만 같았던 한 해의 가을은 어느 청소부의 비질에 쓸려가는 낙엽처럼 쓸려갈 것이며 내 인생 한 장의 달력도 찢겨 나갈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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