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수필 3부작 고향의 그림자_제3부 하룻밤 풋사랑
김철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살았건 못 살았건 유년 시절을 보낸 고향을 향한 그리움으로 살다가 평생을 몸담아 생활해온 세상과의 작별 시 고향을 떠올리며 눈을 감는다고 한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그리워하는 건 오감을 지닌 인간들뿐만 아니라 미물에 속하는 짐승들의 세계에서도 별 차이가 없는 듯하다. 생애 마지막까지 해풍에 밀려다니는 물과 동고동락하던 연어도 죽을 때가 점차 가까워지면 자신이 태어난 연안을 찾는다고 하며, 여우 역시 뭇짐승과 적자생존(適者生存) 따라 힘겨루기 하던 세상과 이별할 때면 자신이 태어났던 굴을 향해 머리를 둔다고 하는데...
나 역시, 육십 평생 인생살이에 있어 가장 아름답게 살았다고 느껴지는 건 연산2동 철도관사에서 천둥벌거숭이처럼 생활했던 유년 시절이다. 물론 아무리 그 시절이 아름답게 기억된다고 해도 분명히 현재 이 시절에 비한다면 모든 것이 부족했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물질적으로 너무나 풍부한 시대를 살면서 현재 아무리 아름다운 추억거리를 접하게 해준다 한들 “하룻밤 풋사랑” 같은 것이 아니겠나? 먹거리 입을 거리 볼거리가 보(洑)에 홍수처럼 넘쳐나는 시대에 살면서 수많은 별미도 먹어보았고 고급스러운 의복도 몸에 걸쳐봤으며 보기 드문 절경도 구경해 봤으나 못 먹고 못살았던 그 시절 대소쿠리에 퍼 놓았던 꽁보리 식은밥 한 덩어리 찬물에 말아 양념도 하지 않은 된장에 풋고추 찍어 먹던 그 맛보다 좋게 느껴보지 못했으며 다 낡은 코르덴 외투 한 벌로 한해, 겨울을 나던 때보다 추위는 더 크게 느껴지고 볼거리 결핍(缺乏]의 시대를 살면서 쇠똥구리의 모습만 보고도 마냥 즐거워했던 그 시절의 한 모퉁이만큼도 아름답게 여겨지지 않은 건 왜일까? 하고 가끔 나 자신에게 자문(自問)해 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가슴 밑바닥에서 절로 우러나는 자답(自答)은 언제나 초지일관 한결같다. 넌, 비록 모든 물자가 부족한 시대의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야박하고 매몰차기 그지없는 이 시대의 사람들과는 달리 혈관 속에 따뜻한 피가 흐르듯이 남녀노소 누구나 가슴에 따뜻한 정(情)이 흘렀던 이들과 사시사철 동고동락했던 덕분에 로켓이 달나라 가는 시대에 산다 한들 마음 한쪽 구석에나 차겠냐는 것이다. 아무리 현대가 물질만능주의(物質萬能主義) 시대라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물질, 권력, 명예가 아니라 정이라는 것이다. 가슴에 따뜻한 정을 품지 못한 이라면 그 인격체는 제아무리 아쉬울 것 없이 풍족한 생활 여건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았다 한들 돌무덤 속의 시체나 별다름 없을 것이다. 세상 부러운 것 없는 백만장자 억만장자라 하여도 정을 주고받지 못한 이가 지닌 것이라면 지닌 물질들은 몇 장의 휴지에 불과하고 고장 난 냉장고와 같을 것이다. 도회지를 비롯해 산촌이나 어촌에서 생활해온 삶의 모양새에 따라 조금씩은 차이가 나겠지만 나름대로 추억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거라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길든 짧든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한 생애를 살아내야 한다. 아울러 한평생을 살아가며 하루하루 생활의 터전 위에 추억의 거리들을 한 겹 두 겹 쌓아가는 것이 사람들의 생애 모양새라 하겠다. 오감을 지닌 사람에게는 추억이란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했고 한평생을 살게 해주신 부모님의 슬하에 비유할 수 있겠다. 호주머니 속에 돈 한 품 지니지 못한 걸인보다 영혼 속에 애틋한 추억을 지니지 못한 사람이 더 가난하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런 감정도 정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시멘트와 하늘 높은 줄 모른 채 나날이 치솟는 빌딩 숲이 지어낸 문화 속에서 팍팍한 삶의 현실에 쫓겨 자신이 정녕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갈 것인지도 모르면서 하루하루 생활해 나아가는 현대인들은 과연 지친 영혼 어디서 한순간 위안인들 받을 수 있을까…
나 역시, 인정머리 하나 찾아보기 힘든 현재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지금은 비록 넉넉하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세속에 사는 우리 인간들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기에 내 영혼의 소풍 끝날까지 내 부모 같고 고향 같은 추억의 “거리” 들을 찾아 어눌한 걸음 재촉하련다. 먼 훗날 내 육신이 죽어서 한 줌의 재로 돌아갈지라도 영혼의 “개걸(丐乞)”이라는 손가락질받지 않으려고 기해년 벽두에 고향의 그림자 찾아 나섰던 여정의 마지막 걸음을 옮기려 한다.
추억거리, 라고 하여 삶의 큰 테두리 속에서 성장하며 쌓여가는 것이 아니라 극히 소소한 일상 속에서 탄생하고 자라가듯이 “고향의 그림자” 마지막 장에서도 나의 유년 시절 소소한 일상 속에서 자리 잡았던 소소한 “추억거리”를 소개하려 한다. 내 제2의 고향인 연산2동의 옛 모습은 지금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굳이 그 시절의 옛 모습을 찾자면 미수(米壽)의 연세에 걸맞게 점차 옛 모습을 잃어가며 외롭게 옛 자리를 지켜낸 철도관사 몇 채뿐 일 것이다. 이다음 다시 비슷한 주제의 글을 쓰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만약 다시금 나의 유년 시절 추억의 도래지를 다루는 글을 쓸 경우, 과연 옛 모습을 지닌 연산2동의 옛 철도관사가 몇 채나 남아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앞설 뿐 아니라 도시계발 계획에 밀려나 한 채도 남아 있지 않을 수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마저 떨쳐버릴 수가 없다.
글을 쓰다 피곤하여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며 내 평소 생활 모습처럼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려 TV 앞에 놓여있던 베개를 베고 물끄러미 TV를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나의 대여섯 살 때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갔다. 그 당시 철도관사 16호 2의 안방에서 마루로 건너설 때 6~7㎝ 높이의 문턱은 대여섯 살의 장애아에겐 꽤 높은 걸림돌이었다. 주변에 높은 건물들이 있다는 건 상상조차 못 할 시절이었다. 우리 가족이 살았던 16호 2는 연산2동 철도관사 57호 동 134가구 중 가운데 연산동 안 동네 쪽으로 맨 끝에 자리 잡고 있었고 가까운 주변에 민가조차 드문드문 들어서 있었던 터라 북쪽으로 난 현관문만 활짝 열어놓으면 안방에 앉아있어도 주변에 숱하게 늘려있던 논밭이 사계절 변해 보이는 갖가지 풍경들을 한눈에 즐길 수 있었다. 하루에 한 번 어머니 등에 업혀 구경하는 그 시절 동래구 풍광은 어린 동심을 만족시키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시야가 틔어있었다. 어수선했던 나라 안 사정 때문에 눈만 뜨면 학생시위가 이어졌으며 그럴 때마다 동래고등학교 학생들이 주역이 되었던 터라 어머니 등에 업혀 우리 집 뒷마당 한 귀퉁이에 서서 매캐한 최루탄 냄새와 함께 썰물처럼 밀려 나오던 학생들의 무리를 쉽사리 볼 수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하루 중 혼자 지낼 시간이 많았던 나는 무료하고 따분했던 시간을 땜질하기 위하여 무릎을 세워 종종걸음으로 걸어서 이동해야 했던 나의 처지에 6~7㎝ 높이의 문턱은 어느 야산의 언덕보다 높게 여겨졌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문턱을 오르내리며 크고 작은 세 개의 방과 현관, 부엌 등을 두루 다니며 창문과 출입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깥세상을 구경했는가 하면 그 문턱을 베개 삼아 엎드린 채 사계절 변해가는 표정들을 말동무 삼았었다. 뿐만이 아니라 내겐 결코, 낮지 않은 이 문턱을 넘다 앞으로 엎어지는 통에 혀를 깨물어 크게 다쳤던 일화도 있었는데 60년이 흐른 오늘날 꽤 심했던 출혈도 멎은 지 오래고 비교적 부위가 컸던 상처의 흉터도 흐르는 세월 더미에 묻혀 흔적을 찾을 순 없지만, 그 당시 아팠던 기억과 걱정하시던 어머니 표정은 아직도 내 생애 추억거리로 생생히 살아있다.
내 인생 급행열차는 심정도 모른 채 무정하게도 앞만 보고 내달리지만, 사계절 쌓아왔던 나의 유년 시절의 일화들은 엊그제의 일들인 양 내 영혼의 가슴을 후벼판다. 나 역시 이 세상의 한 구성원으로 살다가 천명을 따르고자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것이고 기억 속 추억거리들 모두 흔적 없이 사라지겠지만 모든 추억거리가 세상 인연들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기에 내 인생의 여정에서 숱하게 추억의 거리를 쌓는 동안 악연으로 말미 하여 쌓아진 추억이 있다면 그가 어느 누가 되었든 그의 영혼에 용서를 청하며 좋은 인연으로 말미 하여 쌓아진 추억이 있다면 영혼의 세상에서도 함께 했으면 좋겠다. “하룻밤 풋사랑”의 그림자로 남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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