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두레박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예수가 죽은 자를 애도하는 법/강신숙 수녀님(성가소비녀회)

松竹/김철이 2020. 3. 27. 19:26

예수가 죽은 자를 애도하는 법 

[강신숙 수녀] 3월 29일(사순 제5주일) 에제 37,12ㄹ-14; 로마 8,8-11; 요한 11,1-45


‘애도’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자가 그를 추모하며 겪는 아픔의 방식이다. 애도의 슬픔 밑바닥

엔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다는 절망이 깔려 있다. 사랑할수록 절망과 애도는 비례하고, 마침내는 그

의 죽음을 받아들여만 하거나, 혹은 받아들일 수 없거나 한다. 이런 애도는 반드시 죽은 자에게만 한

정되는 것이 아니다. 불가에서는 ‘생노병사’를 제외한 인간의 모든 ‘애별리(愛別離)’를 첫째가는 고통으

로 여겼다. 그만큼 사랑하는 이와의 작별은 사별 못지않은 슬픔을 동반한다. 애도는 죽은 자와 산 자

를 연결하는 관계의 경계에서 일어난다. 애도가 잘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죽은 자

를 떠나보내는 일이 성공해야 산 자는 제 삶으로 돌아올 수 있다. 문제는 떠남과 돌아옴의 경계인

데, 이 경계에서 애도의 방식이 결정된다. 산자는 자신의 삶으로 돌아올 것인지, 아니면 죽은 자를 붙

들고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애도의 문제는 ‘죽음’이라는 실제가 닥치고 난 뒤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이별)

을 예감하며, 언젠가 헤어질 것을 안다. 죽음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돼 평생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론

적 문제다. 그래서 죽음과 함께 우리는 평생에 걸친 ‘애도’를 마음 한 켠에 두고 살아가는 건지도 모

른다. 사는 동안 만났던 모든 것, 모든 시간은 다 애틋하며, 가끔은 온 존재를 엄습해 오는 무엇이 되

기도 한다. 죽음은 기실 인간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다. 


라자로는 예수가 사랑한 보기 드문 인물로 알려졌다. 복음은 예외적으로 곳곳에서 이 사실을 알린다.

(요한 11,3.36) 예수는 그런 라자로가 죽어가고 있다는 기별을 받고 베타니아로 돌아오지만 그가 죽

은 지 이미 수일이 지난 뒤였다. 장례를 끝낸 마리아와 마르타도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다. 그러

나 오늘 복음이 전하는 실제 관심은 라자로에 있기보다 라자로의 죽음을 둘러싸고 애도하는 사람들

과 예수에 있다. 죽어가는 라자로를 살리고자 애타게 예수를 기다리던 마리아와 마르타, 이미 죽

은 라자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관심이 쏠린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러하다. 복음은 예수에 대

한 이들의 관심이 잘못된 판단일 뿐 아니라 예측 역시 모두 빗나갔음을 전한다. 


사실 라자로에 대한 예수의 태도에는 기대만큼의 애도가 보이지 않는다. 라자로의 죽음에 대한 예수

의 인식은 “우리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요한 11,11)는 데서 잘 드러난

다. 라자로는 이미 살아 있는 자들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슬픔에 빠질 이유가 없다. 마

리아와 마르타는 죽은 라자로의 무덤을 배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하늘을 우러

러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까닭이다. 예수의 아버지 하느님은 죽은 자들의 아버지가 아니

라 살아 있는 자들의 아버지다.(요한 11,39-42 참조) 


애도. (이미지 출처 = Pixabay)

그렇다 해서 예수의 ‘애도’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예수는 인간이 겪는 가장 극심한 고통의 정점

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이별과 죽음에 대해 무감각하거나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다. 만

일 그랬다면 그가 사람으로 강생한 자체가 부정되는 것이며, 그를 기록한 인간 예수는 가짜이거

나 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는 정반대에 서 있다. 그가 보인 일거수일투족에서 분출

되는 강렬한 생명은 그가 느끼고 체득한 죽음의 정체에 대한 반증이다. 이런 사실은 왜 예수가 고난

받는 종으로서 사순시기의 정점에 있는지를 알게 한다. 그는 고통받는 이들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

로 여긴 하느님의 아들이다. 예수의 아버지에 대한 계시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상관없이 독단적으

로 이루어지는 심판관이 아님을 보여 준다. 더구나 그의 죽음과 부활이 영웅적이고 유아론적인 신

을 입증함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신은 성경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위대하기만 한 신을 믿

고 섬겨 온 사람들은 라자로의 죽음에 상심한 이들을 대하는 예수를 다시 바라보길 권한다.


다만 예수가 경계한 것은 애도가 죽은 자에게서 멈추는 일이다. 그가 죽음과 삶의 경계에 놓인 바위

를 치우게 한 것도, 그 동굴에 빛을 들여보낸 것도 모두 살아 있는 자가 죽은 자와 함께 떠도는 것

을 막기 위해서다. 예수의 애도에는 처음부터 절망적인 죽음 같은 것은 없었다. 그에게는 영원한 단

절이라든가, 혹은 마르타의 “마지막 날, 다시 만날 때까지”(24)와 같은 삶과 죽음의 유예가 없다. 라자

로의 부활은 라자로가 살아 있는 자들과의 연속성 안에서 계속 살아갈 것임을 알리는 사건이다. 


예수의 “부활과 생명”(25)은 예수 한 개인의 부활이 아니라 세계를 연결짓는 사건이다. 그는 우리로

 ‘인해’ 죽고 부활한 첫 번째 사람으로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우선적 조건이게 한다. 그래서 그

와 함께 바치는 애도에는 생명이 요동친다. 애도는 자신의 연민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힘이며, 사랑했

던 이와의 관계와 시간들을 새로이 복구시키는 힘이다. 그러나 애도는 무엇보다 끝없는 나락으로 삶

의 끈을 놓아버린 이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게 한다. 이것이 예수가 한 애도의 궁극적 방식이

었다: 그가 ”큰 소리로 라자로를 불러내니, 죽었던 라자로가 걸어 나왔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그

를 풀어주어 걸어가게 하여라.’”(43-44) 하자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그렇게 하였다. 우리가 해야 할 진

정하고 궁극적인 애도는 예수처럼 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가 마르타에게 다짐한 “믿음”(25)의 근거

가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되돌아보게 한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출처:가톨릭뉴스 지금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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