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그런 분주하고 소란스러운 사랑의 모습 속 들것에 뉘인 채 들어온 중풍병자가 집 앞을 서성입니다. 그러다 그 집 위에서 들것에 실려 내려옵니다. 주님의 앞에 내려오는 그와 그 들것을 들고 힘주고 있는 이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우리는 이 중풍병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보다 먼저 그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말씀은 '용서'였습니다. 그리고 이 용서는 세상이 그에게 내린 죄에 대한 선언이었습니다. 병에 걸려 몸을 쓰지 못하게 된 이를 사람들은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 함께 와 있던 많은 아픈 이들을 대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그들도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이 곳을 찾았습니다.
주님의 능력 이전 사람들의 사랑이 그들을 이 곳으로 이끌었고 그것은 주님의 말씀인 '용서'의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선언은 그분의 진심이며 사람들이 먼저 알아야 할 가치입니다. 곧 아프고 힘겨운 삶에 필요한 것은 그들을 구해주는 능력이 아닌 그들을 걱정하고 함께 하는 용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용서를 말하며 그가 더 이상 사람들에게 버림 받거나 소외된 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를 이렇게 내 몰았던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들에게 이 병자는 여전히 '죄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용서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픔을 죄인으로 내몬 사람들. 그들에게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질문을 하십니다.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둘 중 예수님은 이미 하나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용서'였습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으로 우리는 이 이야기를 기억해야 하지만 그 기억은 수정될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것 이전에 이미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그 때 그 사람들도 주님의 기적에 입이 막히고 맙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슬픈 일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정말 주려하신 것은 사랑의 가치이지 당신의 능력에 대한 감탄과 감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걸어가는 걸음은 여전히 슬퍼보입니다. 그는 그 기적의 증거일 뿐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다시 멀어져 가는 듯 보입니다. 그의 사회적 가치는 주님의 능력에 대한 증거일 뿐 주님께 받은 위로와 사람들에게 받은 사랑은 이내 사라지고 말았을 겁니다.
지금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그런 못난 습관은 왜 이리 잘 배우고 이어가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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