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松竹/김철이 2020. 1. 17. 08:25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주님에 대한 소문이 많은 이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함께 모였고 그들의 모습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고 싶어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사람들의 변화는 이스라엘에 꼭 필요했던 사랑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고 그 중심에 계신 예수님도 즐겁게 느껴집니다. 


그런 분주하고 소란스러운 사랑의 모습 속 들것에 뉘인 채 들어온 중풍병자가 집 앞을 서성입니다. 그러다 그 집 위에서 들것에 실려 내려옵니다. 주님의 앞에 내려오는 그와 그 들것을 들고 힘주고 있는 이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우리는 이 중풍병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보다 먼저 그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말씀은 '용서'였습니다. 그리고 이 용서는 세상이 그에게 내린 죄에 대한 선언이었습니다. 병에 걸려 몸을 쓰지 못하게 된 이를 사람들은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 함께 와 있던 많은 아픈 이들을 대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그들도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이 곳을 찾았습니다. 



주님의 능력 이전 사람들의 사랑이 그들을 이 곳으로 이끌었고 그것은 주님의 말씀인 '용서'의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선언은 그분의 진심이며 사람들이 먼저 알아야 할 가치입니다. 곧 아프고 힘겨운 삶에 필요한 것은 그들을 구해주는 능력이 아닌 그들을 걱정하고 함께 하는 용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용서를 말하며 그가 더 이상 사람들에게 버림 받거나 소외된 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를 이렇게 내 몰았던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들에게 이 병자는 여전히 '죄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용서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픔을 죄인으로 내몬 사람들. 그들에게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질문을 하십니다.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둘 중 예수님은 이미 하나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용서'였습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으로 우리는 이 이야기를 기억해야 하지만 그 기억은 수정될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것 이전에 이미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그 때 그 사람들도 주님의 기적에 입이 막히고 맙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슬픈 일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정말 주려하신 것은 사랑의 가치이지 당신의 능력에 대한 감탄과 감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걸어가는 걸음은 여전히 슬퍼보입니다. 그는 그 기적의 증거일 뿐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다시 멀어져 가는 듯 보입니다. 그의 사회적 가치는 주님의 능력에 대한 증거일 뿐 주님께 받은 위로와 사람들에게 받은 사랑은 이내 사라지고 말았을 겁니다. 



지금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그런 못난 습관은 왜 이리 잘 배우고 이어가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