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발표작

5부작 골목 이야기 제5화 잃어버린 정을 찾아서/(수필) 한비문학

松竹/김철이 2018. 4. 30. 16:06

 - 연작 수필 5부작 골목 이야기 -

제5화 잃어버린 정을 찾아서

 

                                                                         김철이


  처음엔 네 발로 그다음엔 두 발로 마지막에 세 발로 사는 것이 사람 본질의 모습이다. 이 본질 속엔 정()이라는 따뜻한 강물이 쉴 새 없이 흐르는 가슴이라는 커다란 강이 존재하는데 사람의 정이 흐르는 가슴은 세상이 열두 번 바꿔도 절대 변해서는 안 될 것이지만, 이 강 속에 흐르는 강물의 농도는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이 차이를 줄이고 사람의 정이 지속해서 흐르는 곳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현대화 건설 붐에 떠밀려 존폐 위기에 다다른 골목길이다. 날이 갈수록 이기적으로 변해가고 영악하게 변해가는 이 시대 현대인들을 바라볼 때 조상들의 얼을 애써 떨쳐내듯 헐어버려 점차 사라져 가는 골목길의 그 따뜻한 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옛날 티 없는 동심이 하루해와 함께 뛰어놀던 곳, 동네 아낙들 팍팍한 일상생활 몇 자락 수다로 털어내던 곳,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양어깨 짓누르던 삶의 무게를 몇 모금 담배 연기에 실려 보내던 가장들의 애환과 한숨이 서린 곳, 그 따뜻한 정과 인간미의 버팀목 역할을 해주었던 골목을 찾아 펜의 순례를 떠난다.

 


  부산의 마지막 달동네인 동구 범일동 안창마을은 도심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아 부산 중심지와 곧바로 이어지는 자그마한 분지에 자리 잡아 도심 속 작은 섬처럼 주변 경관과는 대조를 이루는 이곳은 분지 안쪽 끝이라는 의미로 안창이라는 마을 이름을 지어 불러왔다는 것이다. 이곳 안창마을은 6.25 한국전쟁 때 수십 년 정든 고향과 눈물로 이별하고 정치 이념과 부모 형제의 가슴에 겨누는 총, 칼을 피해 북으로부터 피난 내려온 실향민들이 한 채, 두 채 지어 생활해온 판자촌이 지금의 안창마을 그 모습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안창마을 긴 골목길을 끼고 흐르는 긴 하천이 있는데 소음과 매연으로 찌들기 전 그 옛날 산수 좋고 물 맑던 시절에는 2급수 맑은 물에서만 생존하는 갖가지 민물고기가 사시사철 뛰놀았으며 아낙들의 최대 고충 중 하나인 세탁시설이 없었던 시절이라 해동할 시기엔 동네 아낙들이 머리에 해 묶은 빨래통을 이고 나와 몇 달 묶은 겨울을 씻어 흘려보내곤 했다는 것이다. 달과 함께 하루를 만나고 헤어졌던 달동네 안창마을 골목길은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긴 골목인데 안창마을 사람들은 이 긴 거리의 골목길을 걸으며 실종돼 가는 사람의 정을 실어 날랐을 것이다.

 


 부산에는 6.25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피난 온 실향민들의 고달픈 일상생활과 관련된 삶의 애환이 서린 곳이 많은데 용두산공원과 국제시장, 그리고 영도다리와 이 장에 쓰고자 하는 부산의 대표적인 골목길인 사십 계단이 바로 그곳이다. 계단은 부산 중구에 있는 이곳은 부산 문화명소 중 하나이다. 한국전쟁 당시 이 근처에 거주하던 피난민과 부두노동자들의 희로애락을 기리기 위해 국민은행 중앙동지점부터 사십 계단까지의 거리를 '사십 계단 문화관광 테마 거리'로 조성된 바 있는 이곳은 동광동 전역에 이르는 골목길로서 오십 ~ 육십 년대 어려웠던 시절 서민층의 수많은 희로애락이 잠재돼있는 곳이다. 특히 전장의 포화를 피해 북에서 피난 온 피난민들의 고향 잃은 서러움과 삶의 애환과 향수가 응달의 그림자처럼 짙게 이루어져 있는 사십 계단 일대를 그 당시의 생활상을 테두리로 잡아 대화재 전의 옛 부산역을 작은 주제로 하고 피난민들의 하고 싶은 이야기처럼 늘어진 기찻길과 피난민을 태워 나르던 부산항을 큰 주제로 하여 바닷길로 조성하였다는 것이다. 추억의 사십계단은 언제 어느 시기에 만들어졌는지 뚜렷한 기록은 없지만, 중앙동 새 마당이 생겼던 시기가 1908년인 걸 참고해 보면 동광동 5가 언덕 윗길에서 중앙동 4가 새 마당으로 내려서는 계단길이 바로 사십 계단을 오르내리던 골목길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은 국제시장 입구 대청로사거리 건너편에서 보수동 쪽으로 나 있는 좁은 골목길에 수많은 책방이 밀집되어 있는데 여기를 통칭하여 보수동 책방골목이라 하는데, 국내에 얼마 남아 있지 않은 헌책방 골목으로 부산 명물의 거리 중 하나로 손꼽힌다. 6, 25 한국전쟁으로 부산이 우리나라 임시수도로 정해졌을 때 북한에서 피난 온 한 부부가 구호지책 생계의 수단으로 보수동 사거리 입구 골목 안 목조건물 처마 밑에 상자를 펼쳐놓고 미군 부대에서 나온 갖가지 헌 잡지와 만화, 멀고 가까운 고물상으로부터 수집한 각종 헌책으로 노점을 열었는데 그것이 바로 보수동 책방골목이 생기게 된 시발점이라는 것이다. 그 시절 수많은 실향민은 국제시장에서 장사하며 어려운 삶을 이어가고 있었고, 부산에 있는 학교는 물론 피난 온 학교까지 구덕산 자락의 보수동 뒷산에서 노천교실·천막 교실 등을 열어 못다 태운 향학열을 불태웠다. 곧 보수동 골목길은 수많은 학생의 통학로로 붐비게 되었다. 그 이후 여타 실향민들이 가세하여 노점과 임시 건물을 지어 책방을 하나둘 열어 책방골목이 형성되었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수많은 학생과 지식인들이 자신이 소장했던 헌책을 내다 팔기도 하고 다른 이가 팔려고 가져온 헌책을 사기도 하며 자연스레 책방골목은 성황을 이루었다. 특히 신학기만 되면 보수동 책방골목은 북새통을 이루었으며 때때로 희귀본이나 값진 개인소장 고서도 흘러들어와 지식인 수집가들 사이에서 경쟁심을 불러일으키는 화제가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전성기는 좁은 보수동 책방골목 안 구석구석에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힘들 정도의 책방들이 오밀조밀 붙어 지식을 팔고 사람 사는 정을 살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서민들이 종로를 지나는 고관들의 말을 피해 애용하던 뒷골목인데, 당시에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말을 탄 고관대작을 만나면 행차가 끝날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 했다. 이 때문에 갈길 급한 서민들이 번거로움을 피하려고 이용했는데 피마(避馬)에서 유래해 이름이 붙여진 피맛골은 조선시대부터 서민의 애환이 서린 청진동 166번지에 위치한 골목길로 1983년 도심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된 이래 수차례에 걸쳐 재개발이 시도되었고 눈물로 부르짖는 민의도 무시한 채 2009년 청진동 재개발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에 밀려 600년간 서민의 애환이 서려 있던 피맛골이 몇 줌 흙먼지가 되어 영영 오지 못할 추억 속으로 사라져 갔다는 것이다. 종로 피맛골은 한국전쟁 중에도 훼손되지 않고 살아남은 골목길이다. 1950년 인천상륙작전을 이끈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종로를 포함한 서울시 전 지역에 대한 폭격을 계획했다. 이에 당시 주일 공사였던 김용주는 경복궁, 덕수궁 등 주요 고궁과 사대문만큼은 문화적 가치가 크기에 폭격을 자제할 것을 요청했다. 다행히도 맥아더 장군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종로 거리는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한국전쟁에서도 기적처럼 살아남은 피맛골은 세월이 흘러 정치인과 건설업자들에 의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상업 시설 통로로 변하고 만 것이다. 이에 대해 '피맛골에 대한 강간'이라며 분개한 미국인 문화비평가 스콧 버거슨은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평을 한 바 있다.

 

 "한국이 (생각하는) 외국 관광객 유치를 위한 최상의 방법은 피맛골과 같은 역사적인 랜드마크를 파괴하고 서구에서도 볼 수 있는 똑같은 모양의 영혼 없는 현대적 고층 건물을 세우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랜드마크를 부수고 현대적 고층 건물을 세우는 것이) 외국 관광객들을 떼로 불러들이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이러하듯 피도 살도 나누지 않은 외국인마저도 피맛골 파괴에 대해 애통해 하며 분괴를 느끼는데 한겨레 한민족인 우리나라 국민들은 코앞의 이익과 몇 품의 돈에 눈이 멀어 육백 세나 되신 조상의 혼이 무너지는데도 내 일이 아니니 상관없다는 듯이 죄다 방관자 노릇만 하고 있었으니 얼마 가지 않아 우리네 가슴에 흐르는 따뜻한 정()마저 죄다 팔아먹고 텅 빈 껍데기로 살아가지나 않을는지 걱정이 봄철 논밭에 웃자라는 청보리와 같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