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락눈
김철이
기계도 고장이 나고 사람도 고장이 나지만, 세상에 고장이 없는 건 오로지 세월뿐인 듯싶다. 부단히 어깨 인대를 다쳐 병원과 한의원 두 곳의 외래치료를 받던 중 원인 모를 후유증으로 왼팔 상부에 밀어닥친 심한 통증 탓에 밤잠을 이룰 수 없어 수면제에 의지하여 하루 두세 시간의 토끼잠을 자곤 했는데 처음엔 한 알의 수면제로 몇 시간 잘 수 있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잠을 자는 시간이 짧아져 나중엔 두세 알의 수면제로도 전혀 수면을 취할 수가 없었고 정신만 몽롱하게 흐려질 뿐 잠은 오지 않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풍문에 듣기로 죄수들의 고문방법 중 며칠 동안 잠을 재우지 않는 것이 있고 그 방법을 동원한다면 아무리 철통같은 정신력을 지닌 이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넋 속에 묻힌 죄목까지 죄다 털어놓고 말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드는 것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정신분열 환자가 돼가는 듯하여 수면제를 대신해서 알코올의 힘을 빌리기로 하고 하룻밤에 소주 한 병씩 마시고 두세 시간의 밀린 잠을 청하곤 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느 날 하루는 밤이 되어 잠자리에 누워 불면증과 사투를 벌일 때쯤 문득 스쳐 가는 생각이 이다지도 꼴사납고 한심스러운 내 모양새를 용납할 수가 없었던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도 때도 없이 가슴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통에 꼬빡 잠이 들었을 때도 화가 치밀면 가슴에 거대한 돌덩이로 짓눌러 놓은 듯 답답해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이러한 증세는 예고도 없이 드러나는 탓에 하루하루 생활하기에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후진하던 자동차에 받혀 휠체어와 동반하여 뒤로 넘어지는 교통사고를 당해 팔자에 없는 병원 입원 신세를 지게 되었고 그 후 두리발로 출근하다 기사의 안전띠 조작 미숙으로 차체 내에서 역시나 휠체어를 동반하여 넘어져 다쳤던 곳을 몇 차례 거듭해서 다치는 바람에 여태껏 완치되지 않고 엿가락 늘어지듯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 사이 살점 같은 세월은 천리마를 탄 듯 몇 걸음 앞서 달려간 뒤에…
내 생에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기억될 만큼 힘겨웠던 삶의 사투의 가장자리에 꿀떡같이 눌어붙어있던 화병(花甁)의 기운은 평소에 누이동생처럼 여기는 이의 봉사적 기(氣) 치료와 사람들의 건강을 좌지우지하는 온갖 기혈(氣血)이 존재하는 손가락 마디마다 압봉(壓棒)을 붙여 막힌 혈을 뚫어 병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화병은 치유되었으나 다친 팔과 어깨에 남은 통증의 잔해는 좀체 떨어지지 않고 해를 두 번이나 넘긴 오늘에 이르렀는데 2014년 갑오년 말띠 해 2월 초의 일이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옛 동무를 만난 듯 무척이나 기뻤다. 작년 7월 개소식을 한 동래구 장애인 자립생활센터 소장직을 수행하기 위해 출근길에 앞서 팔과 어깨의 치료를 하려고 활동 도우미와 함께 병원을 향해 네 바퀴 걸음을 걷고 있을 때였다. 집 모퉁이를 돌아 집 옆 마트 앞을 지나려 할 때 “휙!” 하고 얼굴을 가볍게 스치는 느낌이 싸락눈 같았다. “혹시 싸락눈?” 그렇지 않아도 아침 하늘이 잿빛 울상이라 비라도 내릴까 했는데 반가운 눈이라니 아직도 내 영혼 속에 순박한 동심이 살아 존재하는가 보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잦아진 싸락눈이 매우 반가워 말은 못하고 옛 동무를 “툭툭!” 치듯이 싸락눈은 두툼한 나의 상의를 건드리며 하나둘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싸락눈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도우미가 “형님! 모자 씌워드릴까요?” 한다. 순간 대답이 없자 “형님! 눈 오는데 모자 씌워드릴까요?” “괜찮아.” 점차 눈발이 강해지니 파카에 부착된 모자를 쓰지 않겠느냐는 걱정스러운 물음에 남의 속도 모르고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으로 퉁명스럽게 내뱉은 나의 대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싸락눈을 나의 피부에 직접 닿아보기는 내 생애 단 두 번째였기 때문이었다. 내 나이 다섯 살 때 어머니 등에 업혀 겨울철에 내리는 눈을 직접 맞아보고 몸소 체험해 보라시던 그 자상스러운 배려로 난생처음 싸락눈을 몸소 맞아본 후 45년 만에 이뤄진 재회이니 얼마나 반가웠고 방해꾼이 된 듯한 도우미의 언행이 얼마나 귀찮은 존재로 느껴졌겠는가?
병원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 안 되지만, 대자연과의 대화가 가능한 나와 싸락눈 사이 많은 무언의 대화가 한동안 이어져 갔다. “너, 정말 오랜만이다. 왜 그렇게 보기가 힘들어?” “아냐, 난 매년 널 찾아왔었는데 엄마의 등에 업힌 널 찾을 수가 없어서.”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은 감정을 간신히 억눌렀다. “맞아 세월이 부당히 흘러도 사람의 모습과 마음이 변하지 대자연은 한 치 변하지 않은 법이지.” 어릴 적 어머니 등에 업혀있던 나의 모습을 기억하는 싸락눈의 단어 없는 투정에 고마운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미안해, 그리고 날 기억해줘서 고마워.” “넌, 많이 변했구나?” “그럴 수밖에…”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글쎄…” “무슨 대답이 그래 싱겁게” 난, 싸락눈의 몇 마디 물음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여태 살아온 나의 생애를 일거수일투족 다 보고 다 알고 있을 대자연 분신 앞에 내 살아낸 육십 년 인생을 왈가왈부할 수가 없었다. 물리치료 후 센터 사무실에 출근하여 창밖을 내다보니 나와의 만남이 못내 아쉬웠던지 진눈깨비에 불과했던 싸락눈이 제법 세찬 눈발로 나부끼다 순간적으로 멈추는 것이었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사는 존재라고 했듯이 나는 대기 중의 수증기가 찬 기운을 만나 얼어서 땅 위로 떨어지는 흰색 결정체인 눈(雪)에 관한 추억이 남달리 많은 편이다. 그 이유는 몸이 성치 못하니 여느 아이들처럼 사계 중 겨울 한 철 내리는 눈과 일심동체 동심 속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제대로 기르지 못했던 점도 있을 것이다. 아늑한 그리움처럼 느껴지는 나의 눈에 관한 첫 번째 추억은 내 나이 다섯 살 때였다. 아침나절 집 안 청소를 하시던 어머니, 청소도구를 내동댕이치고 황급히 내게 달려와 “철아! 눈 온다. 첫눈 맞이 가자.” 어머니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나를 등에 둘러업고 현관 밖으로 달려 나가셨다. 지방 특성에 맞게 눈은 인색하게 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큰 폭설이 내려도 여느 아이들처럼 몸소 눈을 체험하지 못했던 내게 눈을 체험시켜 주시려는 어머니의 가슴 따뜻한 사랑이었다.
두 번째 눈에 관한 추억은 내 나이 여섯 살 때의 일이었다. 그해 겨울은 따뜻한 부산 특성에 걸맞지 않게 눈이 잦은 한 해였는데 저녁나절 낮잠을 한숨 자고 나니 깔고 잤던 요가 온통 원인 모를 물기로 젖어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도 모르게 자다 실례를 저질렀나 싶어 어눌한 손놀림으로 아랫도리를 만져봤으나 탈이 없었다. “그런데 왜?” 라는 자문을 던지며 괜스레 숨을 죽인 채 부엌의 동정을 살피던 중 방으로 들어오신 어머니, “일났으머 눈곱 띠고 나온나 밥묵구로 호호호”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었던 나는 목 늘인 새남터 순교자 된 양 “저…. 엄마 이거. “와? 뭔데?” “이거 내가 안 그랬거든.” “와? 니, 이불에 오줌 쌌나? 화이고야! 우짜꼬. 니 동생도 여태 이불에 오줌 한번 안 지렸는데 오빠가 되가 이불에다…“ 어머니도 어머니였지만, 누이동생 볼 면목이 없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기저귀를 땐 후로 오줌 한번 지리지 않은 걸 자랑삼았던 날 골려주려고 눈 오던 날, 누이동생을 시켜 눈도 체험시켜줄 겸 눈사람을 만들어 내가 낮잠에서 깰 때쯤에 이불 속에 넣어두라는 어머니 선의의 음모였는데 낮잠이 너무 깊이 들었던 탓도 있고 저녁 식사 준비로 분주했던 탓으로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나 자신이 죄 없는 죄인이 된 사건이었지만, 지금은 기억 속의 한 자락 뒤쪽으로 물러나 앉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맴돌 뿐이다. 2015년 을미년 양띠 해의 2월도 아직 다 살지 않았으니 올해 2월 중엔 또 어떤 눈의 추억들이 내 영혼 속에 한 겹 두께로 내려앉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