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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故鄕)의 향수(鄕愁)를 찾아서 (여섯) 동심(童心)은 성심(成心)의 스승

松竹/김철이 2014. 9. 26. 10:50

연작 수필 7부작 고향(故鄕)의 향수(鄕愁)를 찾아서 (여섯) 동심(童心)은 성심(成心)의 스승

 

내 추억의 향수를 제조해 냈고 동심을 길러가는 근원적 요소가 돼주었던 곳은 내 제2의 고향인 부산 연제구 연산동 철도관사였다. 철도관사(鐵道官舍)는 연제구 거제4동과 연산2동에 건립된 동해남부선 철도부설과 관련한 관사였다. 철도관사를 세운 것은 1930년대 초의 일이었다. 목조에 기와집으로, 그 구조는 거의 같아서 철도관사라고 불리었다. 이 관사에는 주로 일본인 고급기술자가 입주하였다가 동해남부선의 완전개통으로 철도부설을 위한 기술자 대부분이 물러나고 그 뒤는 철도국 직원의 관사로 바뀌었다. 광복 이후 적산가옥(敵産家屋)으로 개인에게 불하(拂下)되었다. 철도국은 동해남부선이 부설되기 이전에는 철도부설을 위한 기술자와 공무원(公務員)들의 주택으로 지금의 거제동 철도역 서쪽이자 화지 산 동쪽인 현재의 거제4동 비탈과 거제3동, 연산2동과 연산5동 지역에 집단으로 철도관사와 사택이 지어졌다. 우리 가족이 생활했던 관사는 당시 연산2동에 속해있었다. 거제동 쪽은 비교적 지위가 높은 일본인 기술자 관사가 136동(棟), 연산동 쪽에는 공무원(公務員)들의 사택이 57동(棟)이 지어졌다. 내 동심의 향수를 영혼에 물들여 갔던 보금자리는 그 옛날 전기로 운행했던 전차처럼 머리와 꼬리가 구분되지 않았고 한 지붕 두 가족이 생활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두 가구 중 한 집은 동쪽을 향해 있었고 다른 한 집은 서쪽으로 향해 있었다. 두 가구가 1호와 2호로 구별되었는데 우리 집은 57동 중 16호 2였다. 나의 유년시절은 거의 낡고 허름한 이 집에서 보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더없이 큰 보배를 얻었다. 그 낡은 목조건물에서 생활했던 20여 년의 세월이 언어의 마술사 작가의 길을 걷고 있는 현재의 밑거름이 되고 토양이 되었으니 말이다. 동심(童心)이 올 고른 성심(成心)으로 자라는 데 있어 큰 스승 역할을 해주는 것은 철부지 아이들이 서로의 어깨를 부딪기며 즐기는 갖가지 놀이일 것이다. 아이들은 싸우며 자란다는 말처럼 놀이하다 다투기도 하지만 다툼 속에 우정이 싹트고 추억의 향수가 절로 풍겨난다. 나 역시 끼가 넘치는 영혼이라 유년시절 몸이 성치 못한데도 불구하고 갖가지 놀이를 통해 추억의 향수를 제조해 나아갔다. 내 영혼의 텃밭에 골고루 뿌려진 향수의 근원지를 찾아서 동심으로 돌아가 어릴 적 즐겨 했던 갖가지 놀이를 해보기로 하자

 

 온 동네 주민의 구성원이 철도원 가족들로 되어있었던 터라 아이들의 놀이도 자연스럽게 철도와 관련된 놀이가 많았는데 대표적인 놀이가 기차놀이였다. 기차놀이는 여러 명의 아이가 앞뒤로 한 줄로 늘어서서 앞의 사람의 어깨나 허리를 잡고, 혹은 긴 새끼줄을 둘러 연결하여 기차 흉내를 내면서 노는 놀이였는데 그 시절만 하여도 연산동 본동뿐만 아니라 연산동 안동네에서는 농사를 짓는 가정이 많았으므로 요즈음 도회지와 달리 기차놀이에 사용할 새끼줄을 꼴 짚은 얼마든지 구할 수가 있었다. 연산동 안동네 농가에서는 농사일에 쓰일 거름을 구하기 어려워 똥지게를 진 채 본동으로 나와 당시 푸세식이었던 화장실 인분을 팔라고 사정했던 시절이니 얼마나 순박한 시대의 사람들이었나를 한눈에 느낄 수 있질 않은가 기차놀이를 할 때면 어김없이 힘이 세고 체격이 컸던 형님은 기관사 노릇을 하였고 걸을 수 없었던 나는 역장 역할을 도맡아 했었다. 바람개비 놀이는 나와 성품이 내성적인 누이동생이 자주 즐겼던 놀이다. 갖가지 색의 색종이로 만든 바람개비를 불어오는 바람에 의지하여 돌리며 돌고 도는 물레방아 같은 세상사에서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진리를 일찍이 깨달았던 것 같다. 돌아가는 색종이 바람개비를 바라보면서 신 나고 즐겁기는커녕 왜 그리 눈물이 나든지 누이 몰래 흐르는 눈물을 훔치느라 혼이 멀리 달아났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초에 세뱃돈을 받아 모처럼 주머니가 두둑해지면 이 놀이를 즐겼다. 이처럼 동전을 던져서 하는 놀이는 요즈음도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행해진다. 오늘날의 돈치기는 운동장이나 마당같이 평평한 곳에서 약 5m쯤 거리에 금을 긋고 동전 1개 들어갈 만한 구멍을 파서 제각기 돈을 던져 구멍에 가까운 순서대로 차례를 정해 따먹는 놀이이다. 이 놀이는 내가 직접 할 수 없었으니 내가 받은 세뱃돈을 일부 형님에게 건네주고 만약 돈치기해서 따면 나누어 갖기로 하는 투자형 돈치기를 했었던 셈이고 돈치기하는 형님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꼈던 샘이다. 손 그림자놀이는 전기공급 사정이 좋지 않았던 시절이라 정전이 한번 되면 짧아야 30분 길어지면 한두 시간이 걸려야 전기가 들어오곤 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 틈을 타서 형님과 누이동생은 손장난을 시작했던 것이다. 방안 어둠을 밝히는 불빛이 어두울수록 물체의 그림자는 짙게 드리워졌고 정전이 되면 촛불로 잠시 어둠을 밝혀야 했기 때문이었다. 곁에서 지켜보시던 부모님께서 합세하는 날이면 그날 밤은 방안이 온통 짐승들 천지가 되곤 하였다. 손놀림에 따라 방안 벽은 외양간으로 둔갑하여 소와 말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고 개와 닭의 쫓고 쫓기는 난투극이 벌어지곤 하였다.

 

 호드기 불기는 매년 음력 3월이 되면 시냇가에 자라는 버드나무에 물이 오르는데 그 가지를 꺾어 한쪽 끝의 껍질을 일정한 길이로 벗겨 낸 다음 벗겨 낸 부분을 잡고 비틀면 물이 오른 나무껍질이 조금씩 돌아간다. 껍질을 칼로 잘라낸 뒤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잡아당기면 마치 춘삼월 뱀이 허물을 벗듯이 속이 텅 빈 껍질만 남고 나뭇가지는 빠져나온다. 이것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한쪽 끝의 표피를 칼로 긁어내고 납작하게 입구를 좁히면 호드기가 탄생하게 된다. 호드기는 그 길이와 굵기에 따라 음의 높낮이와 강약을 조절할 수 있다. 길이가 짧은 호드기를 입에 대고 불면 ‘호득호득’ 하고 외마디 소리를 내지만, 길게 만들면 그 음도 긴 여운을 남긴다. 호드기의 구멍이 가늘면 고음이 나고, 굵은 버들가지를 이용하면 저음이 난다. 솜씨가 좋은 아이들은 피리처럼 여러 개의 구멍을 뚫어 불기도 하였다. 야밤에 호드기를 불면 집 안으로 뱀이 들어온다고 어머니께 꾸중도 많이 들었다. 해동이 되기 무섭게 형님이 그 시절 아낙들이 빨래통을 머리에 이고 가서 빨래해 오던 냇가로 달려가 꺾어온 버들가지로 호드기를 만들어 불었는데 호흡이 짧았던 나는 불기가 어려워 애를 태우던 기억이 새롭다. 놀이는 많았지만, 아직도 기억 속에 쉬 지워지지 않는 놀이가 있다. 그것은 전쟁놀이였다. 길게 흐르는 도랑을 하나 가운데 두고 적산가옥 철도관사 사택과 철도관사 아파트가 있었는데 철도관사 사택은 주로 철도국 내에서 사무직이나 직위가 높은 기술직에 근무하던 가족이 생활했고 1자 형태로 지어진 네 동의 2층짜리 철도관사 아파트는 철도원 중에서도 일반 기술직이나 노무직에 근무했던 가족들이 생활했었는데 왜 그랬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평소에도 앙숙으로 양쪽 아이들이 자주 다투곤 했다. 그 다툼이 크게 번질 때도 있었는데 철도관사 사택에서 생활했던 아이들과 철도관사 아파트에서 아이들이 두 패로 갈라져 타다 남은 연탄재로 포탄으로 삼고 도랑을 삼팔선으로 삼아 던지고 맞고 하다 보면 온 동네는 다 탄 연탄재와 덜 탄 연탄재로 얼룩이 지고 뒤범벅이 되어 아비규환이란 말 그 자체였고 6, 25 한국전쟁 축소판을 보는 듯싶어 어린 철부지 소견에도 가슴이 먹먹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의 주역들도 피를 나눈 동족이었고 연산동 철도관사 작은 전쟁의 주역들 또한, 한동네 한가족이고 같은 밥솥의 밥을 먹었던 철도원 식솔들이었기에… 유년시절 동심의 향수로 이 글을 쓰고 있으니 동심(童心)은 분명, 성심(成心)의 스승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