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발표작

연작 수필 7부작 고향(故鄕)의 향수(鄕愁)를 찾아서 (둘) 무정(務停)한 세월(歲月)/(수필) 월간 한비문학

松竹/김철이 2014. 4. 22. 13:10

연작 수필 7부작 고향(故鄕)의 향수(鄕愁)를 찾아서 (둘) 무정(務停)한 세월(歲月)

 

 

 잘났건 못났건 세상 모든 사람은 향수(鄕愁)란 커다란 굴레 속에 갇혀 살아가는 향수병(鄕愁病) 환자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과묵한 성품을 지닌 이라 하여도 겉으로 표현만 하지 않을 뿐, 향수병 환자 이긴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한낱 미물(微物)에 불과한 연어도 주어진 생을 마감할 시기가 되면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향해 거센 물살을 헤치며 올라가고 여우도 죽을 때면 자신이 태어난 굴을 향해 머리를 둔다고 하였는데 만물의 영장이라 일 큰 인간이야 오직 하겠는가 남녀가 애정이란 두 글자를 놓고 승부가 나질 않는 씨름을 할 때 흔히 잘 쓰는 말로 행복하면 사랑이고 외로우면 집착이라는 속설처럼 고향을 향한 개념도 같게 여기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고향을 떠올렸을 때 아름답고 행복한 느낌이 저절로 샘솟았다면 그것은 분명히 고향에 대한 사랑이자 애정이다. 반면에 고향을 생각할 때면 괜히 우울하고 기쁘고 행복한 느낌보다 아팠던 기억이 앞서거나 해 묵힌 상처의 딱지 때문에 고향에 관한 생각이 어깨에 짊어진 지게처럼 무겁게 느껴지지만, 어쩔 수 없이 고향의 모습을 떠올려야만 하는 경우라면 그것은 집착이 분명하다.

 

 나 역시 향수병 중증환자라 하겠다. 안태고향에 관한 기억은 전혀 없지만, 내게 실질적 고향 역할을 해주었고 인생길에서 따뜻한 정이 흐르며 행복한 기억을 되새김질하게 해준 추억의 그림자들이 숨 쉬며 살아 있는 곳, 제이의 고향 이곳에 묻어 있는 향수의 향기들은 뚜껑을 열지 않아도 몇십 년을 뛰어넘어 머리에 서리가 내리고 팽팽했던 얼굴에 주름이 진 내 영혼을 유년시절 철부지 아이로 살게 충동질한다. 추억 속 허공 위에 사라질 이 향수의 향기들을 하나씩 풀어 남은 삶의 옥토를 양질로 가꾸고자 한다.

 

  그 중 하나의 향기는 내 나이 일곱 살 때의 일이었다. 어머니는 몸이 자유롭지 못한 아들에게 바깥바람을 씌어주며 바깥세상을 구경시켜주기 위한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루에도 두, 세 차례 일광욕을 겸한 바깥나들이를 업어서 시켜주시곤 하셨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오후 5시경 어머니 등에 업혀 사방이 훤히 틘 집 부엌문 옆을 서성이고 있을 무렵 집 뒤로 보이던 부산 서면 쪽에 뿌연 연기와 같은 액체가 피어올라 고개를 어머니 얼굴 앞으로 내밀어 영문을 물었더니 금세 어두운 표정을 지으시며 학생들이 데모를 하나보다 라는 걱정 담긴 말씀과 함께 혀를 껄껄 차셨다. 그날이 바로 (1960. 4. 19) 독재 정치와 부정부패 타도를 외치며 불의에. 항거하며 전국(全國) 학생들이 분개하여 일어난. 학생 혁명의 날이었다. 어머니 말씀을 듣고 나니 오금이 절로 저려 두 다리로 가냘픈 어머니 허리를 감싸 안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뒤 들었던 입소문에 의하면 민주화를 외치던 청춘의 꽃들이 무자비한 경찰의 구둣발에 짓밟혀 피어보지도 못한 채 4월 하늘 꽃 비가 되어 이 땅 역사의 토양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 추억의 향기이야기로는 내 나이 여덟 살 되던 해 여름의 일이었다. 찌는 듯한 삼복더위를 식혀줄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 한 대 구경하려면 하늘의 별 따기였고 잠깐 속 열기를 달래줄 아이스크림이나 팥빙수 한 그릇 먹어보려 해도 광대가 무당 굿 구경하기였지만, 그 시절 여름은 참으로 정겹고 당시 국내 전기사정이 좋지 않아 하루 저녁에도 몇 차례씩 정전이 되었던 터라 전깃불이 언제 나가려는지 하는 불안한 마음도 있었겠지만, 저녁 늦게 전깃불을 켜놓고 저녁밥을 먹게 되면 한층 더 더위를 느낀다는 생각에 하루해가 서산마루 고개를 넘어가려 할 시간이면 온 동네 아낙들의 손길은 분주해질 수밖에 요즈음처럼 텔레비전이나 컴퓨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삭막한 시대에 사는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처럼 이기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었던 덕에 저녁 식사가 끝나면 약속이나 했던 것처럼 남녀노소 구분 없이 하나 둘 동네 주민은 우리 집 옆 골목으로 몰려들었다. 그도 그를 것이 유별난 손재주를 지니셨던 아버지께서 튼튼하고 널따란 나무로 평상(平床)을 짜거나 양쪽 가로다리 네 개가 달린 긴 나무의자를 만들어 집 옆 골목에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마른 풀을 뜯어오라고 시켜 뜯어온 마른 풀로 모깃불을 피워놓고 고단한 일과()를 풀어내곤 하였다. 별이 총총한 밤하늘 허공을 향해 타오르는 모깃불을 가운데 놓은 채 어른들은 힘겨운 삶의 희로애락을 얘기했고 철부지 아이들은 천둥벌거숭이처럼 떨어지는 별똥을 찾느라 여염이 없었다. 뛰어노느라 구슬 같은 땀방울이 등골을 타고 내려올 양이면 가까운 냇가로 달려가 밤하늘 별들이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 물로 뛰어들어 더위를 씻어낸다는 핑계로 곤한 잠에 빠진 물고기들을 깨우곤 하였다. 운이 좋은 날이면 사각 나무통을 어깨에 메고 밤거리를 누볐던 아이스케이크 장수를 만나 부모님께 아이스케이크를 먹게 되고 한 개라도 더 팔려는 상술로 둥근 나무판 위에 1에서 10까지의 숫자를 그려놓고 닭털이 부착된 가는 침으로 자신이 원하는 숫자를 꽂아 맞히게 하여 만약 자신이 원하는 숫자를 맞히면 아이스케이크 하나를 더 줬는데 그 재미로 한사코 더운 여름밤에 밖으로 나갔던 것이다. 그날도 운 좋게 아이스케이크를 얻어먹고 기분이 좋아 콧노래를 부르며 평상 위에 평발을 하고 앉아계신 어머니 다리를 베고 누웠는데 메케한 모깃불 연기를 피해 여름철 불청객 모기란 놈이 민소매 러닝만 입고 있던 나의 팔뚝에다 공습경보도 없이 무차별 기총 소사를 퍼붓는 것이 아닌가? 모기와 유별난 천적관계였던 나는 어머니께서 부채로 쫓아주시는 모기도 한이 차지 않아 심통을 부리다 초저녁부터 덥고 답답한 모기장 속에 홀로 갇혀 몇 시간 지루하게 지냈던 기억에 지금도 여름만 되면 난적 모기란 놈이 싫고 무섭기 그지없다.

 

 지금 생각해도 등골에 식은땀이 절로 흐르는 추억의 향기가 있는데, 그때 내 나이 아홉 살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형님이 여름방학을 즐기려 친구들과 연산동 안동네 논으로 미꾸라지를 잡으러 가며 나도 함께 데리고 갔었는데 그 시절엔 돈도 돈이지만, 국내에서 장애우들의 필수품인 휠체어를 구하기란 추운 겨울 들녘에서 열대 과일 찾기였던 터라 아버지께서 탁월한 손재주를 발휘하여 전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고 내 몸에 안성맞춤인 휠체어를 손수 제작하여 주셨기에 그 아버지표 휠체어를 타고 형님을 따라갔었다. 한참을 미꾸라지 꼬리 유혹에 온 정신이 팔려있을 때 어디선가 갑자기 “저놈들 잡아라!” 하고 날벼락 치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논 주인이 자기 논의 물꼬 탈낸다고 허겁지겁 달려온 것이었다. 혼비백산 아이들은 달아났으며 혼자 남은 내가 어찌할 바 모르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였다. 좁은 논두렁길에 앉아있는 바로 내 코앞에 덩치가 산만한 트럭이 비켜달라 빵빵거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 자리를 모면할 수 없었던 나는 마냥 울고 있었는데 한 집 건너 이웃에 살던 형님 친구가 불현듯이 나타나 내가 타고 있던 휠체어를 밀어다가 집까지 데려다 주는 것이었다. 그날 나는 진땀 나는 위기를 용케도 모면했지만, 아우를 위기에 홀로 두고 달아났던 형님은 그날 저녁 혼이 났었다. 이러하듯 정겹고 아름다운 추억들이 청명한 밤하늘 별들처럼 총총한데 무정한 세월은 고장도 없이 흘러만 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