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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故鄕)의 향수(鄕愁)를 찾아서 (하나) 세월의 뒷전으로 물러앉은 나의 유년시절

松竹/김철이 2014. 3. 27. 14:41

고향(故鄕)의 향수(鄕愁)를 찾아서 (하나) 세월의 뒷전으로 물러앉은 나의 유년시절

 

 내 삶의 터전에서 향수란 사물이나 추억에 대한 그리움. 타향에 있는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나 그 덕분에 생긴 시름이라는 표징적 개념을 훌쩍 뛰어넘는 단어다. 때로는 잊으려 해도 영영 잊히지 않고 가슴속에서 새록새록 뒤 살아나는 추억의 정겨움이기도 하고 간혹 그리 호강하며 살지 못한 유년시절 서리고 아팠던 상처의 딱지로 다가와 여린 심성을 괴롭힐 때도 있다.

 

 그 옛날,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호계천이라 이름 붙여진 하천이 흐르고 범일동에서도 가장 끝자락에 자리 잡은 부산 동구 범일동 안창마을에서 승자도 패자도 없이 혈육의 가슴에 삼팔선이라는 선 하나 그어놓고 대단원의 막을 내린 한국전쟁 이의 후유증으로 국내 모든 분야가 어수선해 있을 무렵인 천구백오십삼 년 어느 추운 겨울날 장차 세계 최고의 기공장(工匠)이 되기를 꿈꾸며 가슴에 품은 소망을 키워가던 부친과 일제 강점기(日帝强占期)) 시대 일본군 위안부(日本軍慰安婦)로 강제로 끌려갈 위기를 모면하려고 저고리 겉감 한 감을 혼수로 받고 열여덟 어린 나이에 안창마을로 시집온 모친 사이의 삼 남매 중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어릴 적 부모님 먼저 하늘나라로 가신 두 분의 형님을 포함하여 사 남 일 여중 넷째로 태어난 나는 유례도 깊고 상처와 아픔도 많은 안창마을 산동네에서 태어났다. 세상 누구든 타고날 운명을 선택할 권리는 아무도 지니고 태어나지 못하듯 나 역시 안태고향(安胎故鄕)을 향한 풀지 못한 그리움도 많지만, 평생 아물지 못할 상처도 적지 않다. 육신의 병을 얻어 가고 싶어도 한 걸음 의지대로 갈 수 없고 하고 싶어도 단 한 번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없는 몸으로 태어났으니 어린 영혼에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겠는가…

 

 내 나이, 두 살 때 몸이 성치 못했던 탓에 강보에 쌓여 모친의 품에 안긴 채 어차피 홀로 걸을 인생길에서 수많은 추억과 적지 않은 상처를 지어낼 제 이의 고향 부산 연제구 연산동으로 이사했었다. 당시 연산동은 현재 부산 제일의 번화가에 버금가는 현실과 달리 빈민촌이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부산시청이 위치한 부군만 하여도 온통 논밭이었던 터라 철이 들기 시작한 어린아이의 기억 속엔 일요일만 되면 부친은 형님과 누이동생의 손을 잡고 지금 부산시청 청사가 있는 근처에서 메뚜기를 잡아 대병으로 두, 세 병씩 잡아오시곤 하셨다. 인생은 한가로움을 즐길 줄 아는 동물이라는 속설에 걸맞게 나의 부친은 공휴일 한가로움을 틈타 엽총을 들고 주변 들녘으로 나가 벼가 익어갈 무렵 주변 농부들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참새떼를 잡아 숯불에 구워주시곤 하셨는데 참새의 몸집이 워낙 작다 보니 아무리 먹어도 감질만 목구멍에 목탁 질 할 뿐이었지만, 맛은 세상 어느 고기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비록, 다들 넉넉하지 못했지만, 인심만은 후하기 그지없던 시절이었으니 이웃에 새로 이사 온 이웃사촌이 또 다른 이웃사촌에게 인사도 할 겸해서 이사 떡을 들고 이웃집의 문을 노크하니 현관문을 빼 족히 열고 눈만 빼꼼하게 내밀고는 헛말이라도 들어와 차 한잔하란 소리 없이 문전박대하는 이 시대 현대인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이 넉넉하고 정이 절로 흘렀던 그런 행복했던 시대를 살았으니 나 역시, 행복한 사람이다.

 

 타고난 천성은 나라님도 못 말릴 다는 속설처럼 천성으로 타고난 끼를 주체할 수 없었던 부친은 혼자 즐기는 취미생활로 승화시키셨다. 그중에서도 즐겼고 나름대로 자신의 지론(持論)을 펴셨던 것은 낚시질이었다. 낚시질이란 아무런 욕심 없이 자신을 내놓고 세월을 낚아올리는 것인데 내 부친 역시, 세상 누구에게도 쉽게 가슴을 열어 보이며 말할 수 없었던 응어리진 남자의 심정을 대자연과 대화하며 한없이 넓은 대자연의 화폭 위에 그려놓으려 했던 것 같다. 남자는 곰 백 살을 먹어도 결혼하지 않으면 철부지에 불과한 말과 아들놈은 나이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아들자식에 불과할 뿐, 아비의 외로운 심정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뼈저리게 공감하고 인정한다. 부친의 그 외로운 마음 한 자락 둘 곳 없었던 심정을 불혹(不惑)의 나이가 넘어 결혼하고 가정을 가져보니 외로워하셨던 부친의 그 외로운 심정이 시야 속에 절로 들어오니, 난 천하에 둘도 없는 불효자일 것이다. 부친은 눈에도 들지 않는 이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없애려고 낚시질했던 많은 생선을 이웃에 퍼주기를 좋아하셨는지 모른다. 그 시절엔 자연환경이 깨끗했던 덕도 있었겠지만, 부친의 낚시질 솜씨는 워낙 특출하여 한나절 낚시질하면 다래끼가 차고 넘쳐 공동 우물가에 퍼지려 부어놓고 이웃사촌 낙들을 제다 불러모아 가져갈 만큼 장만하여 가져가라 하니 이웃 잘 둔 덕에 온 몇몇 집 밥상 위에 며칠은 생선이 떨어지지 않고 오를 터지만 그 많은 생선을 깊고 넓은 바닷속에서 꼬셔 낚아올릴 때까지는 부친의 숨은 공이 있었다. 흔히 잘 쓰는 말로 낚시를 즐기는 사람은 나태하고 게을러다고 하는데 그러한 표현도 사람을 가려가며 사용해야 하는 것이 부친은 여느 강태공들보다 몇 배의 노력과 질 좋은 낚시질을 위해 많은 신경을 쓰셨다. 물론, 자연보호를 위해 낚시를 하고 난 뒷정리를 하는 것은 필수였고 치어(稚魚)가 잘못 낚싯줄에 걸려 올라올 양이면 혀를 껄껄 차시며 “정말 미안해 너도 엄마 손을 놓친 게로구나 다시는 낚싯줄에 걸리는 일이 없도록 해라.” 하시곤 낚았던 물고기를 다시금 놓아주셨다는 일화를 부친의 오래된 벗을 통해 들은 바 있다. 이러한 아름다운 추억거리가 가슴속에 살아 움직이니 나는 이 지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다.

 

 

 세월도 흐르고 흐르는 세월 따라 사람의 모습도 인정도 무심하게 흘러간다. 흘러갈 강줄기도 달려갈 말 한 필도 없는데 사람 육신의 배를 불리는 건 갖은 양식에 불과하지만, 오감(五感)을 지닌 인간 영혼의 배를 불리는 건 쉬 잊히지 않는 추억이나 사물의 그리움을 향한 향수(鄕愁)다. 금전적이나 인간적으로 아무리 부유한 사람이라 하여도 추억이나 향수를 기억 속으로 되새김질하지 못하는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고 가난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내 영혼의 강가에 향수나 추억의 물이 흘러갈 모티브 한 가지를 더 소개하자면 내 나이, 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그 시절, 부산 철도국 내 삼랑진(三浪津) 수원지에서 근무하셨는데 야간 근무를 하시던 중 강물을 거슬러 밤 나들이 나왔던 자라 삼 형제가 부친의 눈에 띄었고 그렇지 않아도 박봉에 몸보신 한번 제대로 못 시켜주는 둘째 아들이 마음에 걸려 노심초사하시던 터라 부친은 자라 삼 형제를 생포해 두었다. 다음 날 아침 퇴근하며 가지고 오셨던 것인데 양철로 만든 큰 대야에 넣어둔 자라 삼 형제가 철부지 어린 악동의 생각에 얼마나 신기했던지 그 시절 아낙들이 빨래할 때 사용하던 물방망이로 자라 삼 형제의 등을 번갈아가며 쿡쿡 찔러대니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속담처럼 그렇지 않아도 전시(戰時)도 아니고 생포 당해온 것만 해도 서러운데 세상에 태어난 연배로 따지면 한참 어린 꼬맹이가 약을 올리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자라 한 마리가 마치 수중발레를 하듯 양철 대야 밖으로 솟구쳐 오르는 것이 아닌가 이 모습에 혼비백산했던 나는 비명을 지르며 부모님께서 계셨던 안방을 향해 지난해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남자 100미터 우승자 자메이카의 요한 블레이크는 아니었지만, 거북이 잰걸음으로 백미터 달리기를 했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라는 속담에 걸맞게 난, 지금도 큰솥뚜껑만 접할 시면 가슴이 절로 두근거린다. 시대도 변하고 인정도 변하는 법, 부산의 유명한 출사지로 남은 안창마을에서 호랑이 울음은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쓰레기와 갖은 오물로 오염된 호계천만은 아쉬움과 안태고향을 향한 향수를 뒤로 밀어내고 여태 흐르고 있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