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강서구 강동동에서 시설 농사를 짓는 이우성 씨가 비닐하우스 안에서 오이 줄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척박한 농업 환경속에서도 이 씨는 친환경 농법을 도입, 그 나름의 희망을 일구고 있다. | |
"남의 땅에서 농사 짓는 심정, 안 당해보면 모르지. 갑자기 주인이 땅을 팔아버리지나 않을까. 새 주인이 비키라고 하거나 임대료를 올리겠다고 하면 어쩌나. 가슴 한구석이 늘 납덩이처럼 무거워요. 게다가 요즘은 이 지역이 개발바람을 타고 있으니 우리 앞날이 어떻게 될지…. 엎친 데 덮친다고, 생산비는 오르고 농산물 값은 내리고. 휴…."
한때 김해평야의 알짜배기 땅이라던 부산 강서구 강동동 들판의 한 비닐하우스. 추적 추적 내리는 초여름 빗방울 속에서도 농민 이우성(50) 씨는 마냥 놀수 없는 처지라며 오이 줄기 돌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군 제대 후부터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25년째 농사를 짓고 있건만, 그의 청춘을 불사르게 한 '땅'은 아직도 '행복'이란 선물을 선뜻 내주지 않는다고 그는 긴 한숨을 섞어 푸념했다.
자식같은 농작물
"농사 짓는 사람들은 왠만큼 비가 와도 쉴 수가 없어요. 여기 이 오이들이 내 새끼, 내 자식 같은데 잘 자라도록 곁에서 돌봐야 하거든." 주름 잡힌 그의 얼굴에 회한 어린 미소가 스쳤다. 그에게 오이는 단순한 생산품이 아니라, 자식이자 분신이었다. 오이 한 박스(55~60개) 가격이 얼마쯤 되느냐고 묻자 이 씨의 표정은 이내 어두워졌다.
"농산물도매시장 등에서 특상품 판정을 받으면 5000원이지만, 대개는 중간등급을 받아. 그러면 2500~3000원쯤 되지. 포장 박스 1개에 970원, 운송비가 600원꼴이니 중간등급때 한 박스에 1500원 정도 받는 셈이지. 그럼 오이 한개당 가격이 30원 정도지. 이러니 생산비를 어디서 찾노?"
오이 파 고추 토마토 무 배추 등 채소류와 벼농사를 병행하는 이 씨의 지난해 매출은 그래도 괜찮았다. 이 씨는 "8000만 원 정도 매출을 올렸는데 생산비용이 3500만 원 가량 들어갔으니 그런대로 먹고 살 수는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올해다. 유류비 비료값 등 생산비가 폭등한 반면, 주 생산물인 채소류 값은 오히려 내려 생산비보다 매출액이 적은 역전현상이 예상되기 때문. 그가 예상한 생산비는 5000만 원 정도지만 인건비와 기타 경비, 농가부채 이자, 임차료 등을 더하면 7000만원도 넘을 수 있는데 매출은 그에 못 미칠 전망이라는 것이다.
언제 내쫓길 지…
"얼마 전 주인이 땅을 팔면서 비닐하우스 설비를 모두 걷어내라고 하더라구. 매입자에게 온전한 모양의 땅을 넘겨주려 했던 것 같아. 그래서 펄쩍 뛰었지. 저 설비에만 생돈 3000만 원이 들어갔는데 무작정 뜯어내라고 하면 어떻게 되느냐고 말야."
다행히 새 주인과 이야기가 잘 돼 비닐하우스를 일단 존속시킬 수 있었지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불안감이 씻기지 않는다. 이 씨는 "비단 나만 그런 것이 아니야. 여기 농민들이 모두 같은 상황이지. 난 그래도 내땅이 조금이라도 있지만 100% 임차농인 사람도 부지기수"라고 밝혔다.
부산 강서구청에 따르면 강서지역 농민의 임차 비율은 공부상으로 70% 정도지만 알음알음으로 하는 임차가 많아 실제론 80%가 휠씬 넘는다고 한다. 이 씨가 땅을 빌린 대가로 주인에게 줘야 하는 임차료는 벼논의 경우 1마지기(150평) 당 연간 쌀 60㎏, 하우스 시설부지는 1마지기 당 쌀 180㎏씩이다.
농가부채 또한 가계를 억누르는 요인이다. 이 씨가 안고 있는 부채는 8000만 원. 이 가운데 5000만 원은 담보 부채로 연이율 7.5%를 부담해야 하고 3000만 원은 정책자금으로 연이율 3%대다. 월 이자만 40만 원 가량 나간다. 이 상황에서 빚이 더 늘어난다면 생활자체가 어려워진다.
포기할 순 없잖아
이 씨는 강서구 강동동의 젊은(?) 채소류 재배 농민들의 모임인 '강동 청농회' 회장을 3년째 맡고 있다. 청농회는 힘겨운 농촌에서 희망의 물꼬라도 터 보자고 모인 자생모임이다. 이 씨는 5년 전부터 독학 등으로 친환경 농법을 배워 농사에 접목키고 있다. 성과는 어떨까. 그는 "몇번 실패를 했지만 이제 서서히 익숙해 지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 소득 증대로까지 연결되지는 못하고 있다"고 했다. 웰빙 바람을 타고 친환경 농작물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지만 경기가 안좋고 가격이 비싸다 보니 수요는 많지 않다고 한다. 그는 "친환경 농법은 농약과 비료 등을 거의 안쓰기 때문에 생산량이 일반 농작물 보다 30~50% 가량 적다. 게다가 아직은 복잡한 유통구조 때문에 제값을 받기도 쉽지 않다"면서 "학교 급식에 친환경 농작물이 들어갈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것"이라고 했다. 김해시의 경우 친환경 급식 보조비 예산을 대폭 늘린 사례가 있다고 소개한 이 씨는 부산시도 그런 방향으로 갔으면 한다는 바람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데 부산시 어디를 봐도 농촌을 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걱정이다. 이 씨는 "기회의 땅이라는 서부산 개발계획이 자기 땅 없는 농민들에겐 두려움 또는 막막함으로 다가온다"고 말했다.
이 씨의 자녀는 대학 3학년생인 아들 1명이다. 아들에게 농사를 물려줄 생각이 없느냐고 묻자,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격정을 토했다. "본인이 강력하게 농사를 짓겠다고 주장하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없겠지. 어떻게 보면 농사일은 사실상 우리 세대에서 끝나지 않을까 싶기도 해. 우리 집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땅에 농사가 사라질 것에 대한 우려지. 굳이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을 쓰지 않더라도, 이렇게 농업을 무시하고 내팽개치면 머지않아 식량주권 문제로 큰 위기를 당할 거야. 핸드폰 수천 개 외국에 내다 팔아도 먹을 거리 못사서 난리가 날 수도 있어."
오이가 자라고 있는 비닐하우스를 떠나려던 기자의 팔을 굳이 끌어당긴 이 씨는 싱싱하게 잘 자란 풋고추를 한 웅큼 손에 쥐어 봉지에 담아 줬다. "부인이랑 애들이랑 나눠 먹어봐요. 이래봬도 이것이 친환경 작물이야"라는 말과 함께. '빼앗긴 들'에서 타들어 가는 가슴을 안고 살아가지만 들판의 농심은 아직도 뜨거웠다. 이 씨는 영락없는 이 땅의 농민이었다.
■ 전국 임차농의 현실
- 농가 62%가 임차농 1㎡당 수입 1172원
통계청이 국내 농가 3200곳을 표본 조사해 최근 발표한 '2007 농지 임대차 조사결과'에 따르면, 임차농가는 조사대상 농가 중 1984농가로 전체에서 62%를 점했다. 2001년 72.5%를 점했다가 2002년 71.7%, 2005년 63.0%, 2006년 62.5%로 계속 감소하는 추세다. 농림수산식품부 관계자는 "임차농가가 줄어드는 것은 노동력 부족에다 농사를 지어도 수익이 많이 나지 않아 임차한 농지를 땅주인에게 되돌려주는 사례가 많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1㎡당 임차농가의 총 수입은 1172원으로 2006년의 1252원보다 6.4%가 줄었다. 한 농가당 임차 농지 면적은 0.6㏊로, 농가당 평균 경지면적 1.5㏊의 42.8% 수준이다. 농가가 임차한 농지의 소유자는 비농가가 61%에 달했고, 그 다음 농가(21.0%)와 국공유지(4.2%), 한국농촌공사(2.4%) 순이었다. 비농가 소유 비율은 정부의 규제 강화로 2004년 70.9%에서 2006년 63.2%로 다소간 감소세를 보였다. 영농 규모가 클수록 임차농지 비율도 높게 나타나 5㏊ 이상의 임차농지 비율이 63.9%를 차지했고, 0.5㏊ 미만은 25.1%로 나타났다.
현행 농지법에는 1996년 이후 취득한 농지는 면적에 관계없이 자경을 원칙으로 한다. 농지은행을 통하지 않고 대리경작을 하는 것은 불법이다. 따라서 자경하지 않는 농지는 처분해야 하지만 농지은행에 위탁하면 계속 소유가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는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얼마전 청와대 일부 수석비서관이 자경 여부가 명확하지 않은 농지를 소유했다가 말썽을 빚은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