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소식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 (15)기도에 대한 이해 ③신비주의

松竹/김철이 2008. 5. 23. 17:54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 (15)기도에 대한 이해 ③신비주의

 

 

현존하는 예수님 통해 하느님 사랑 달성

신앙은 하느님 존재·사랑에 대한 ‘체험’ 있을 때 가능
그리스도는 신비주의가 이루는 모든 것의 성사적 표지

체험이 없는 신앙은 없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체험’이 있을 때 가능해 진다. 하느님 사랑, 하느님 존재 그 자체에 감동받지 못한 신자가 어떻게 이웃에게 사랑을 전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신자들(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종교적 체험 하나씩은 모두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체험은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하느님 섭리에 대한 자각일 수도 있고, 성체 성사에서 느낄 수 있는 뜨거운 은총 체험일 수도 있고, 깊은 기도 수련 중에 접하는 황홀경(신비체험, 탈혼)일 수도 있다. 또 나도 모르게 섬광이 번득이듯 다가오는 말씀일 수도 있다. 또한 이 체험은 소외된 이웃을 남모르게 돕는 애긍실천과 본당 봉사활동, 선교 운동, 성직자와 수도자에 대한 조건 없는 존경 등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그럼 과연 하느님을 직접 만나는 체험은 가능할까. 그 체험은 어떤 것일까. 일단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전통적으로 신적 존재와 개인적 만남에서 발생되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 깊은 지식’으로 기술되어 왔다. 구약성경에는 이런 신비적 체험이 널려 있다. 아브라함이 그렇고 야곱이 그렇고 모세가 그렇다. 이밖에도 수많은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직접 체험했고 그 메시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했다. 이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했고, 인격적 친구로서 이야기도 나눴고, 황홀경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기도 했다. 이들에게 하느님은 인간적 열망과 추구와 갈망의 대상이었다. 이것은 생명 그 자체와의 만남이었다.

‘보나벤투라’(1217~1274)는 신비주의 신학을 “사랑에 대한 열망으로 하느님께 정신을 모으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장 게르송’(1363~1428)에게 있어서는 “일차적 사랑의 포용을 통하여 얻게 되는 하느님에 대한 경험적 지식”이었다. 더 나아가 ‘로욜라의 이냐시오’(1491~1556)의 하느님에 대한 체험은 그로 하여금 하느님과 창조물들 사이의, 유사성을 전제로 하고 있는 ‘교감적 신비주의’와 짝을 지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로 해서 표상들과 상징, 그리고 개념들이 이냐시오식 영성 훈련들의 주요 부분을 형성하게 되었다. 특히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 사건들은 이 영성 훈련에 있어 기도와 성찰의 한 훌륭한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

‘아빌라의 데레사’(1515~1582)에 있어서는 용어, 환시, 탈혼 체험들이 중추적 요소들을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그녀 자신은 그와 같은 예외적 사건들은 신비주의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녀는 하느님 의지에 부합하는 것, 하느님의 행하심에 자신의 삶을 개방하는 것이 바로 기도의 목적이라는 점을 역설한다. 데레사의 ‘혼인 신비주의’는 그녀를 삼위의 하느님과 결합시켜 주고 있고 그 신비적 결혼의 목적은 섬김에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2)에게 있어서 관상은 사랑을 통해서 영혼에 전달되고 불어 넣어진다. 여기서 관상은 어두운 밤을 관통하여 하느님께 이르는 길, 믿음과 사랑의 여정인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불가시적 실재 세계에 대한 체험이다. 그런데 이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여 다가오는 세계요, 전례를 통해서 그리고 교회 안에 언제나 현존해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들어서게 되는 그러한 세계다.

예수는 신비적 관상의 가장 완벽한 실현이자, 그 대상 자체다. 예수는 당신 자신을 자신의 압바(Abba)께 내어 맡겨 드리고 아버지와의 하나 됨을 체험하는 가운데 신비적 생활을 펼쳐 나가셨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아버지를 아는 것이고,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이 신비적 지식은 영원한 생명 그 자체를 이룬다(요한 17, 3).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신비주의가 이루는 모든 것의 성사적 표지이자 사랑의 하느님과의 총체적인 결합이다.

더 나아가 예수의 신비적 의식은 본질적으로 삼위일체적이다. 예수는 우리 위에 계시는 하느님,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 우리와 함께 있는 하느님으로 아버지와 성령, 자신을 체험하셨다. 따라서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 역시 삼위일체적이다.

신비주의는 결코 현실과 유리된 순간적 환시나, 도피적인 인식이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완전히 달성하는 것이자 ‘지금 여기서’ 인간 불멸의 유산을 성취하는 것이다.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출처 : 가톨릭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