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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복음 특강 | 부활하신 분은 갈릴래아에서 기다리신다 I 수원교구조원동성당주임 I 2026.4.5

松竹/김철이 2026. 4. 5. 07:00

[전삼용 신부님의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복음 특강] 부활하신 분은 갈릴래아에서 기다리신다 I 수원교구조원동성당주임 I 2026.4.5 천주교/신부님강의/가톨릭스튜디오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N4uANHFHpDo

 

 


2026년 가해 부활 대축일 성야 미사 – 부활하신 분은 갈릴래아에서 기다리신다 

할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이 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역설의 현장에 서 있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긴 줄 알았고, 죽음이 생명을 삼킨 줄 알았는데, 오히려 생명이 죽음을 집어삼켜 버린 승리의 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천사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핵심적인 지시가 있습니다. 바로 "갈릴래아로 가라"는 명령입니다.
"서둘러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일러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마태 28,7)
왜 하필 갈릴래아일까요? 예루살렘의 화려한 성전도 아니고, 빌라도의 총독관저도 아닙니다. 왜 그 비천하고 가난한 변방으로 가라고 하실까요? 여기에 부활의 생명을 만나는 ‘방향의 법칙’이 숨어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 내어주어야 근원(헤르몬)을 만난다
이스라엘의 지형을 보면 하느님이 설계하신 기막힌 영적 교훈이 보입니다. 이스라엘 북쪽에는 해발 2,814미터의 거대한 헤르몬 산이 우뚝 서 있습니다. 그 꼭대기에는 1년 내내 녹지 않는 만년설이 덮여 있지요. 이 차갑고 맑은 눈물이 녹아 내려와 고이는 곳이 바로 갈릴래아 호수입니다.
여기서 신비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헤르몬 산으로부터 받은 물을 잠시 머금었다가, 즉시 요르단강을 통해 남쪽으로 흘려보냅니다. ‘내어주는 일’을 쉬지 않습니다. 호수 입장에서 물을 내보내는 것은 일종의 ‘죽음’이고 ‘손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물을 비워내기에, 헤르몬 산은 비워진 만큼 다시 새로운 만년설의 물을 갈릴래아로 끊임없이 쏟아붓습니다. 쉼 없는 순환, 이것이 갈릴래아를 물고기가 넘쳐나고 수많은 생명이 숨 쉬는 ‘생명의 호수’로 만드는 비결입니다. 갈릴래아는 살리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 곳입니다.
반면, 그 물이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사해(Dead Sea)입니다. 사해는 갈릴래아로부터 내려온 물을 ‘모으기만’ 합니다. 나가는 통로가 없습니다. ‘이건 다 내 거야!’라며 움켜쥐는 순간, 뜨거운 태양 아래 물은 증발하고 독한 염분만 남습니다. 결국 그곳은 어떤 생명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생명은 흐르는 에너지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사해처럼 모으고 쌓아두려는 방향으로 가는 사람에게는 당신을 드러내실 수가 없습니다. 빛이 어둠에 삼켜지기 위해 어둠 속으로 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갈릴래아처럼 내어주고 나누려는 방향으로 뛰는 이들에게만 부활의 주님은 마중 나오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가르침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가야 태양을 볼 수 있다는 우주적 자연 법칙입니다. 이제 빛을 만나려면 내가 빛을 향해 움직여야 합니다. 

죽음으로 향하는 사람들: 움켜쥐는 손이 곧 나의 무덤이 됩니다
죽음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집착’과 ‘모음’입니다. 그렇게 다른 이들은 더 부족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주위에는 죽음의 기운이 맴돕니다. 더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는 자가 빛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인도에서 원숭이를 잡는 방법은 참으로 비극적입니다. 좁은 입구를 가진 단지 안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견과류를 가득 넣어둡니다. 원숭이는 손을 넣어 음식을 한 움큼 쥡니다. 그러면 주먹이 커져서 단지 밖으로 손을 뺄 수 없게 되지요. 이때 사냥꾼이 다가옵니다. 원숭이는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려 하지만, 절대 쥔 손을 펴지는 않습니다. ‘이걸 놓으면 굶주릴 거야’라는 집착 때문입니다. 결국 원숭이는 그 작은 먹이 한 줌을 지키려다 자신의 전 생명을 사냥꾼에게 넘겨주고 맙니다. 사냥꾼은 그에게 죽음 자체입니다. 원숭이는 살려고 함으로써 죽음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1947년 뉴욕 맨해튼, 거대한 악취가 진동하는 한 저택에서 형 호머와 동생 랭리 콜리어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들은 명문 대학을 나온 수재들이었고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지독한 저장 강박증(Hoarding)과 불신에 빠져 있었습니다. '세상은 우리 것을 뺏으려 한다. 오직 모으는 것만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믿음으로 30년 동안 모든 쓰레기를 보물이라 믿고 집안에 쌓아 올렸습니다.
그들은 도둑을 막기 위해 신문지 더미와 고철 사이에 정교한 부비트랩(덫)을 설치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 랭리가 눈먼 형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다 자신이 만든 신문지 더미 덫을 건드렸습니다. 순식간에 수 톤의 쓰레기가 쏟아져 내렸고, 그는 자신이 ‘보물’이라 믿으며 모았던 그 무게에 짓눌려 질식사했습니다. 곁에 있던 눈먼 형 호머는 동생이 죽어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쓰레기 벽에 가로막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굶어 죽었습니다.
경찰이 집을 수색했을 때 나온 쓰레기는 무려 140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살리겠다고 모은 것들에 의해 가장 비참하게 살해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이려(모으려) 하면 죽음을 만난다’는 영적 법칙의 실체입니다. (출처: 뉴욕 타임스 1947년 3월 26일 자 기사 재구성)

나의 갈릴래아: 소유의 무덤을 떠나 만난 부활의 예수님
사실 저 역시 한때는 늘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가질까’,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더 높이 올라갈까’ 하는 사해의 방향을 향해 있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소유가 저를 살려줄 생명줄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길 끝에는 안식이 없었습니다. 모으면 모을수록 더 허기졌고, 움켜쥐면 쥘수록 영혼은 메말라갔습니다. 저는 살고 싶어서 모았지만, 생명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께서 제 영혼의 내비게이션을 강제로 꺾어놓으셨습니다. ‘나를 위해 모으는 삶’이 아니라 ‘그분을 위해 전하는 삶’, 즉 사제의 길로 저를 부르신 것입니다. 저는 처음엔 두려웠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다 내어놓고, 결혼도 포기하고, 세속적인 성공도 내려놓으면 내 인생이 통째로 사라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제 자아에게는 ‘죽음’과 같은 선언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 두려움을 뚫고 갈릴래아를 향해, 즉 ‘전하는 삶’을 향해 첫 발을 떼었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신학교에서, 그리고 제대 위에서 성체를 거행하며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난 네게 다~ 주었다."
소유를 통해 죽음으로 가던 제가, 전함을 통해 사제가 되었을 때 비로소 ‘진짜 생명’이 무엇인지 맛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기쁨을 누리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갈릴래아에서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움직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세상의 지혜들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경주 최부잣집의 거름(똥) 철학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300년 동안 부를 유지하며 존경받았던 ‘경주 최부잣집’의 사례는 이 생명의 원리를 기가 막히게 보여줍니다. 최부잣집에는 내려오는 ‘육훈(六訓)’ 중 이런 정신이 있습니다. "돈은 똥(거름)과 같다. 한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지만, 사방에 흩뿌리면 땅을 살리는 거름이 된다."
그들은 돈을 자기 생명을 유지하는 절대적인 목적(사해)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비옥하게 만드는 ‘거름’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했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똥처럼 여겨 기쁘게 뿌렸을 때, 그들은 죽음을 만난 것이 아니라 온 백성의 존경과 가문의 보존이라는 ‘더 큰 생명과 영광’을 얻었습니다. (출처: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

한국의 갈릴래아: 죽음의 방향을 거부하고 생명을 낳은 이요한 씨와 대건이
이런 지혜를 가진 이들은 항상 죽음을 선택하고 생명을 만납니다. 여기, 죽음의 벼랑 끝에서 생명의 갈릴래아를 선택하여 온 세상을 울린 기적 같은 실화가 있습니다. 바로 이요한 씨와 그의 아들 대건이의 이야기입니다.
이요한 씨는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아내마저 떠난 차가운 방에서 그는 갓난아기였던 아들 대건이를 홀로 키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대건이마저 아빠와 같은 유전성 질환인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극심한 절망에 빠졌습니다. '나 하나 어둠 속에 가두어지는 것도 지옥인데, 이 예쁜 핏덩이까지 빛을 잃어야 한다니... 차라리 같이 죽는 게 낫지 않을까?' 그것은 사해의 어두운 유혹이 그를 덮치던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죽음 대신 '생명'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대건이의 '눈'이 되어주기로 결단합니다.
이요한 씨가 절망이라는 탯줄을 끊고 생명을 향해 뛰어갔을 때, 온 세상이 그들의 편이 되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헤르몬 산의 만년설'처럼 무려 1억 3천만 원이라는 거액의 성금을 모아 전달했습니다. 또한 가톨릭 대학교 성모병원은 이요한 씨의 아들에게 수술을 지원하여 한쪽 눈이라도 완전히 실명되지 않게 해 주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름 모를 수많은 봉사자가 달려와 그들이 머물 쾌적한 새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었고, 대건이가 특수 교육을 받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매달 후원금을 보내왔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죽여 아들을 살리려 하자, 세상이라는 생명체가 그들을 껴안은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장성한 대건이는 아버지를 가장 존경하며 세상에 희망을 전하는 청년으로 자라났습니다. 아버지가 생명의 방향인 갈릴래아를 선택했을 때, 죽음의 골방은 생명의 잔칫집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출처: KBS 「인간극장 - 내 사랑 대건아」 2003년 5월 방영분 재구성)

생명으로 향하는 사람들: 심부름하는 자가 기적을 만납니다
오늘 복음의 여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무덤가에서 슬픔을 움켜쥐고 있지 않았습니다.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습니다." (마태 28,8) 이 ‘달려감’이 부활의 핵심 동력입니다. 여인들은 전하는 ‘심부름꾼’이 되었기에, 그 길목에서 마주 오시는 예수님을 뵙는 특권을 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