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어떻게’가 아니라 ‘왜’? | 임준기 다미아노 신부님(서문동 본당 주임)

松竹/김철이 2025. 6. 13. 10:15

‘어떻게’가 아니라 ‘왜’? 

 

                                               임준기 다미아노 신부님(서문동 본당 주임) 

 

 

형제자매 여러분, 한 주간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우리가 믿는 가톨릭은 계시종교라고 말합니다. ‘계 시’ 즉, 열어서 보여준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진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직접 그 신비를 열어서 보여주셔야지만 [믿음으로만] 알 수 있 다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집중하는 삼위일체 교리는 하느님 신비의 정점에 있습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이면 떠올리는 히뽀의 철학자이며 신학자이신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고 싶어 하는 성인이, 하루는 해변을 걸으며 묵상할 때 어린 소년이 작은 컵에 바닷물을 퍼서 해변의 작은 구멍에 다 옮겨 붇겠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지요. 그것은 불 가능하고 어리석은 짓이라 이야기하는 성인께 소년은 이야기 합니다. “당신이 삼위일체 신비를 모두 깨닫는 것보단 빠를 거예요.” 소년은 천사였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각각의 다른 위격으로 계 시지만, 온전히 한 분이시며 똑같은 하느님이시라는 삼 위일체 교리를 어떻게 온전히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오늘 복음을 통해 삼위일체 교리를 발견하고자 한다면 어렵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신자들이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버지에게서 오신 아드님, 그리고 아들을 통해 주어지는 성령에 대한 예 수님의 말씀을 신자들은 은총으로 깨닫고 있었던 것 입니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아버지는 창조주 하느님, 아들 은 구원자 하느님 그리고 성령께서는 거룩하게 하시는 하느님으로 드러납니다. 그 하느님께서는 서로 다른 위격으로 존재하시지만, 그와 동시에 따로 구분되지 않으시고 한 분 하느님으로 행동하시는 분, 바로 삼 위일체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 떻게 하느님께서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느냐?’가 아니라, ‘왜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느냐?’ 묻는 것입니다. [Not How?, but Why?]

 

종교학자들은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섬기는 신 을 닮고자 한다고 말합니다. 전쟁의 신을 섬기는 사람 은 전사가 되기를 원하고, 쾌락의 신을 섬기는 사람은 쾌락을 찾는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느님을 알면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혼자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사랑과 나 눔의 공동체 [세분의 위격으로] 안에 존재 하시는 분 이십니다.

 

사랑의 공동체로 통교하는 방식이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존재방식 입니다. 가톨릭은 사랑의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 종교이기에 사랑의 공동체, 사랑의 종 교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는 삼위일체 하느님 안 에서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소외시키는 공동 체가 아니라, 함께 안고 살아가는 공동체가 우리 공 동체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신비가 우리를 감싸안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지성을 뛰어넘는 사랑 안으로 우리를 받아 주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