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꿀샘

전삼용 요셉 신부님 | 화가 날 때는 언제나 자신의 죄가 드러날 때이다 | 사순 제3주간 월요일, 2025 03 24

松竹/김철이 2025. 3. 24. 07:00

[화가 날 때는 언제나 자신의 죄가 드러날 때이다] 사순 제3주간 월요일, 2025 03 24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x2p5oPJtvdI

 

 

 

 

2025년 다해 사순 제3주간 월요일 – 화가 날 때는 언제나 자신의 죄가 드러날 때이다

사람이 진실 앞에서 보이는 가장 솔직한 반응은 ‘분노’일지도 모릅니다. 진실은 칼날처럼 예리해서,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 감춰진 상처나 수치를 찌릅니다. 루카 복음 4장 24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은, 그들의 종교심과 신앙 안에 감춰진 교만을 정확히 찔러낸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이 말씀이 도대체 무슨 큰 죄가 되었길래, 사람들은 예수님을 끌어내어 벼랑으로 밀쳐 죽이려 하였을까요? 예수님은 단지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의 과부가 아닌, 사렙타에 있는 이방 여인에게 기적이 일어났고, 엘리사 시대에도 이스라엘의 나병환자가 아닌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 치유받았다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그들의 민족적 자부심과 신앙적 특권의식을 건드렸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왜 나는 그 말에 화가 났는가?”라는 질문은 우리 안의 죄를 드러내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저 구약의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한 것뿐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개인적 모욕처럼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죄와 직결된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이런 속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 곧,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느낀 사람이 오히려 더 격하게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잘못이 드러날 것 같을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화를 내고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허물을 가리려 합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주인공 신애의 깊은 상실과 용서, 그리고 분노의 여정을 그립니다. 아들이 유괴되어 사망한 깊은 슬픔 속에서 신애는 지역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며, 신앙을 통해 위로를 찾으려 합니다. 그녀는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기로 결심하고, 교도소로 그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범인은 이미 하느님께 용서받았다고 말하며 평온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저는 이미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안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신애는 큰 충격을 받고, 분노와 혼란에 휩싸입니다. 자신이 용서하려 했던 사람이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에,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던 분노와 상처가 드러납니다. 이는 그녀가 진정으로 용서하지 못했음을, 그리고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하느님과 세상에 자기 분노의 탓을 돌리며 화를 내고 죄를 이어갑니다. 
아담과 하와, 카인과 아벨부터 분노는 자기 죄가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다른 일을 하시지 않고 그저 진리를 말씀하시며 사람들의 분노를 유발하십니다. 비난받는 표적이 되면서 사람들이 자기 죄를 볼 기회를 제공하시는 것입니다. 그 죄를 보고 자기를 고칠 것인지, 그냥 화만 낼 것인지는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다만 죄에서 돌아설 사람들은 분노가 날 때 자기 죄를 보는 이들입니다. 

정확한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인터넷에 나온 엔도 슈사쿠의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그는 192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 신앙을 접했지만, 일본에서의 기독교는 소수 종교였기에 종종 내적인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의 삶과 기독교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며 자랐습니다. 일본은 그에게 매우 세속적이고 불교와 신도 중심의 문화였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엔도는 후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게 되며, 그곳에서 신앙에 대한 회의와 무신론적인 사상을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무신론적인 사상을 깊이 탐구하며, 기독교와 신의 존재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신의 침묵이 고통을 부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왜 신은 인간의 고통 앞에서 침묵하시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고통스러운 답을 찾지 못하고, 결국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던 중, 1950년대 중반, 엔도 슈사쿠는 일본에서 심각한 폐결핵에 걸리게 되어, 일본 도쿄의 와세다 대학 병원(Waseda University Hospital)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폐결핵은 당시에도 치명적인 질병으로, 입원한 시기인 1956년부터 약 1년간 그는 병상에서 고통을 겪으며 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 병원에서의 시간이 엔도에게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입원 후, 엔도는 신에 대한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병상에서 자신의 고통을 느끼며, "왜 신은 내가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데도 침묵하시는가?"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 속에서 그는 신의 침묵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과 죄를 직시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당시의 고통 속에서 점차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엔도 슈사쿠는 그 고통 속에서 점차 신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신은 나와 함께 고통받고 계셨다”라는 깨달음은 그에게 깊은 영적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분노와 상처가 사실 신을 떠나기 위한 방어기제였음을 깨닫고, 그분의 침묵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죄를 드러내기 위한 신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엔도는 회심 후, 자신의 작품인 『침묵(Silence)』에서 그가 겪은 내적 갈등과 신앙의 회복을 풀어냅니다. 이 소설은 일본에서 가톨릭 신앙을 지키려 했던 선교사들의 고난을 다룬 작품으로, "침묵"이라는 주제 속에 신의 고통과 인간의 고통이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탐구합니다. 그는 회심 후, "내가 신을 믿지 않으려 할 때, 그 신을 향한 분노가 더 크게 느껴졌고, 그 분노가 결국 내 죄를 드러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의 회심은 신을 거부하려 했던 자신을, 오히려 신의 뜻을 찾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분노와 고통을 통해 자신을 직시하고 회개할 수 있었음을 깨닫게 했습니다. 이는 많은 이들에게 신앙에 대한 깊은 성찰을 주었고, 엔도는 그 이후로도 그의 작품을 통해 신앙의 의미를 탐구하며, 전 세계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처음엔 분노가 일었지만, 그 말이 나를 위한 진리였음을 깨달았을 때, 삶은 변한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그러하십니다.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살리는 말’을 하십니다. 그 말이 불편하더라도, 분노를 넘어 성찰로 나아갈 때, 우리는 구원의 길에 서게 됩니다.
“그분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히브 4,12)
그 칼날은 우리를 베기 위한 것이 아니라, 썩은 것을 도려내어 새 생명을 위한 수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