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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 | 일상의 거룩함이 기적보다 큰 증거다 | 대림 제3주간 월요일, 2024 12 16

松竹/김철이 2024. 12. 16. 07:00

[일상의 거룩함이 기적보다 큰 증거다] 대림 제3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4 12 16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f3CCcjQrde0

 

 

 

2024년 다해 대림 제3주간 월요일 – 일상의 거룩함이 기적보다 큰 증거다

오늘 복음도 세례자 요한에 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관한 논쟁입니다. 먼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는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이상하게 세례자 요한의 권위를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이 만약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그러면 왜 그가 증언한 나를 믿지 않느냐?”라고 할 것이고, 땅(사람)에서 왔다고 하면 그를 하늘에서 보낸 사람으로 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을 것 같아서 “모르겠소”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너희가 세례자 요한을 대하는 그대로 나도 너희를 대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관심이 없다면 예수님도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말 몰랐을까?’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똑똑한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거룩함을 못 알아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기적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기적을 하시는 예수님도 못 알아보는 것입니다. 알아보지 않으려 한 것으로 자기 양심을 팔아먹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정치인과 언론이 처음엔 윤석열 정권을 적극적으로 동조하다 지금은 적극적으로 깎아내리고 있습니다. 명확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근거가 전에는 없었을까요? 일반 국민도 그가 말하고 토론하는 것 안에서 그 사람이 정상이 아님을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치 빠른 기자들과 정치인들이 그것을 못 알아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일상의 삶은 마지막 큰 사건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에서 거짓말을 하는 이는 결국 다른 거짓말로 자신을 다시 끌어올릴 것입니다. 아랫글은 이에 관하여 한 유튜브 구독자가 어떤 동영상에 올린 댓글입니다. 
“그냥 일반인이 봐도 참모한테 반말에 욕, 일반시민한테도 반말, 손에 왕자 적고 토론, 기차 좌석에 구두 신은 채로 발 올린 거 등등. 그냥 봐도 딱 토론 수준만 봐도 ‘저놈이 대통령 되면 나라 망하겠네’ 생각하고 당선되었을 때 친구들한테 ‘야 우리나라 경제 정치는 망했다.’라고 했는데 언론인이나 정치인처럼 눈치 빠른 놈들이 모른다고? 천만에 다 알고 있었지. 그냥 저놈 대통령 만들고 지들 빼먹을 거 생각한 게 맞지.”(@jjaryno77)
그래서 일상에서 풍기는 것으로 그 사람을 못 알아본다면 그건 거짓말이고 잘못된 의도로 눈이 먼 것일 뿐입니다. 기적을 요구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거짓말 시키는 본질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자기 생존을 위해 말 바꾸기를 할 뿐 언제든 자기 생존을 위해 또 거짓말로 현실을 왜곡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기적보다 우리 작은 일상이 신앙의 증거입니다. 이 증거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기적만 청한다면 이는 그저 믿기를 원치 않는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1990년대 알제리의 작은 마을 티브히린, 이곳의 트라피스트 수도자들은 지역 무슬림 공동체와 함께 조용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수도자들은 시편을 노래하며 기도했고, 낮에는 밭을 일구고, 의사를 겸한 뤽 수사가 주민들을 치료하며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뤽 수사는 환자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단순히 환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이들의 삶은 기적 없이도 주민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를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알제리를 휩쓸던 내전과 이슬람 극단주의의 폭력은 이 평화로운 공동체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극단주의자들이 마을에 찾아와 수도자들에게 협박을 가한 날, 크리스티앙 수도원장은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무기를 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는 극단주의자들을 설득하여 마을을 떠나게 했지만, 그 위협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위험 속에서도 수도자들은 자신들이 떠날지, 남아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며 갈등했습니다. 한 수도자는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우리의 목숨을 잃는 것이 정말 하느님의 뜻일까요?”
크리스티앙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드렸습니다. 떠나는 것은 우리의 소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와 공동체 회의를 통해 남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선택은 단순히 고집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수도자들은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만찬을 나누는 장면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부르심을 회상하며 침묵 속에서 와인과 빵을 나누었습니다. 뤽 수사는 눈물을 머금고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이 순간이 하느님의 평화로 가득 찬 순간임을 믿습니다.”
1996년 3월, 수도자들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납치되었습니다. 두 달 후, 그들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그들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잘린 머리만이 남겨졌습니다. 영화는 수도자들이 눈 덮인 산속으로 호위되며 걸어가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그들의 침묵은 말보다 강렬하게 그들의 믿음과 평화를 증거합니다.
수도자들이 떠난 후, 그들과 함께했던 마을 주민들은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주민들은 이들을 “우리의 형제들이자 하느님의 사람들”로 기억하며, 그들의 희생을 자신들의 삶에 새겼습니다. 한 주민은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믿도록 해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거룩한 삶이야말로 신앙의 가장 강력한 증거임을 보여줍니다. 수도자들의 기적 없는 단순한 삶, 그리고 사랑과 희생의 선택은 하느님의 현존을 세상에 증거하며, 그들의 피로 물든 땅은 새로운 화해와 평화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2018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수도자들을 순교자로 공식 인정했으며, 다른 알제리 순교자들과 함께 알제리 오랑에서 시복되었습니다. 이는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도 그들의 사랑과 신앙이 그리스도교적 삶의 모범임을 강조했습니다.

우리 각자는 일상의 삶으로 그 일을 시킨 누군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사는 사람은 자기 안에 뱀이 있고 사탄의 노예임을 증거하는 것이고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사람은 그 일을 시킨 하느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기적이 아닌 일상의 작은 표양으로 표현되어 누구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거룩한 삶을 사는 이들을 보면서도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저 자기 주인을 버리기 싫어서 보지 못하는 척하는 것뿐입니다. 마지막 때에 증거가 없었다고 하지 맙시다. 모든 사람이 증거가 없어도 믿을 수 있다면 나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