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 20240712 오늘의 말씀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iHa3U7r9rO8
천주교 부산교구 장산성당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오늘의 말씀입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복음 선포의 길을 떠나는 제자들은 세상에 하느님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지닌 우리 교회에도 같은 가르침을 전해줍니다. 거저 받았음은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왔음을 말하고 그것을 전해준다는 것 또한 그래서 가능하고 하나 모자람 없이 완전해질 수 있는 이유입니다. 만약 무엇인가 더 해 지는 것은 더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하는 ‘나의 것’을 말하는 것이고 이는 결국 ‘자신을 위한’ 것으로 하느님 나라와 분리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복음 전파의 수혜자들의 세상은 너무 무섭고 욕심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교회가 스스로를 지키려 애를 쓰는 동안 세상은 감당이 불가능할 정도로 이기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성선설이니 성악설을 이야기하는 이유 역시 사람을 관찰하며 그들 안에 든 허기짐으로 인해 생기는 것에 대한 표현입니다. 하느님을 닮아 창조된 사람이라지만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사람들은 원래 ‘허기짐’을 느끼고 그것을 억지로라도 채우려는 ‘탐욕’을 본능처럼 여깁니다. 그곳에서 ‘이유 없이’ 어려운 이들을 돕고 그들을 용서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 되고 그들의 탐욕을 채워주거나, 이용 당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거기에 ‘전하는 이’의 사적인 욕심이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듯 취급당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주님은 이 복음을 전할 제자들이 이런 유혹에 들지 않길 바라십니다. 그것이 아무것도 없는 제자들을 모든 것을 다 가지려 하는 세상에 보내시는 주님의 처지이고, 하느님 희망의 모습입니다.
“걱정하지 마라.”
그럼에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무엇을, 또 어떻게 궁리할 이유가 없는 것은 그들이 떠난 길이 원래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령이 필요 없는 이유는 원래 우리의 모습을 찾아야 하고 그리 해야하고, 그리 살아야 할 이유를 그들 스스로 전하며 알게 되고 느끼게 되며 하느님 안에서 일치하리라는 주님의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위험해 보이는 길에 제자들을 보내신 이유는 그럼에도 이것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박해에 맞선 우리 모든 순교자들은 ‘죽음’이 아니라 ‘지킴’의 가치로 그 길에 서 있었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우리를 구하시려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본전 생각’과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려는 유혹에 맞서야 할 각오도 해야 하는 우리입니다.
0:00 오늘의 복음
1:50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