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꿀샘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 20240324 오늘의 말씀

松竹/김철이 2024. 3. 24. 07:49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 20240324 오늘의 말씀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pyzadIrh6nY

 



천주교 부산교구 장산성당 주님 수난 성지주일 오늘의 말씀입니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올해도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신을 위해 백성들이 지어 올린 성전이 있는 곳, ‘아버지의 집’이라 부르셨던 그 커다란 믿음의 건물이 있는 도시에 예수님께서 들어서실 때 사람들은 길에 옷을 깔고 손에 푸른 가지를 들고 주님을 맞았습니다. 메시아로 맞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들이었지만 그러나 정작 그 도시 안에서 주님은 전혀 다른 상황을 맞이하십니다.  

“도성 안으로 가거라.”

자신의 인생을 미리 알고 사는 이가 없지만, 주님은 사실 세상에 오시기 전부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오셨습니다. 당신의 구원을 고마워하고 기억하며 자신들의 자부심으로 삼고 있었던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며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셨던 하느님은 결국 당신의 외아들조차 세상에 보내시며 당신의 희망을 꺽지 않으십니다. ‘내 아들은 알아보겠지’라고 생각했던 포도원의 주인처럼 마지막 순간에도 희망을 품었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고 같은 마음이었던 놀라운 아들의 태도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정해진 듯 시간을 살아가던 아들은 그 ‘도성’을 피하지 않고, 스스로 모든 것을 준비하십니다.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을 구했듯 우리가 시작하는 성주간은 하느님의 외아들의 희생으로 세상이 기회를 얻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은 십자가와 예수님의 고통의 순간들이지만 그럼에도 ‘고통’이 예수님의 모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의 수난과 고통의 순간이 아니라 결코 바뀌지 않는 하느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상황 속으로 걸어들어가십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스승님!”

모든 사건의 전환점이 된 것은 당신을 잘 알았던 제자 유다의 인사였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을 가장 잘 헤아리던 유다는 주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댓가로 은전 서른 닢을 받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허망한 죄를 짓고 맙니다. 스승의 죽음까지 생각하지 못한 제자는 그 스승의 죽음에 증언 하나 없이 메시아를 죽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인생이었던 것을 걱정하셨던 스승의 이야기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던 유다의 모습은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보여줍니다.

“그분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서는”

예수님의 고통을 상징하는 가시관과 자주색 옷은 그분에게 왕의 모습으로 던져진 조롱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자신들의 모든 것을 하느님 앞에서 드러내고 말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의 가르침 앞에 가시관과 자주색 옷으로 조롱하고 흉내를 내고서는 그분을 이미 ‘죽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때는 아침 아홉 시였다.”

잠이 많은 이라면, 일어난 시간에 주님은 세상에서 사라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정신을 차리고 길을 나섰을 때 이미 주님의 십자가는 세상에 세워지고 죽음의 시간을 향해 가고 있었을 겁니다. 그처럼 주님의 죽음을 재촉하는 세상이었고, 그들은 모두를 살인자로 만들며 예수님을 본보기로 만드는 일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그들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아 주님을 ‘고통의 길’을 걸으신 듯 생각하고 기억합니다. 십자가를 보며 사랑을 느끼기보다 고통의 일그러진 주님에게 드리워진 인상에 고개를 숙이고 죄책감을 이어받습니다. 따르기는 싫고, 죽인 것은 대신 슬퍼하는 우리의 못난 모습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일주일을 보내시며 어떻게 당신의 정해진 삶을 걸어가시는지 우리는 제대로 봐야 합니다. 아버지와 마지막까지 나누신 기도 속의 바람과 십자가의 길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주신 끝까지 사랑이셨던 주님을 말입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삶은 바로 그리스도의 삶이지, 살인자들의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정해진 전례처럼이나 언제나 같은 우리의 모습들 속에 언젠가는 그 깨달음이 한 번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고 그리스도처럼 죽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