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2 06/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것이 결혼하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해도 될까?/ 연중 제5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36Kix74R9-U
2022년 다해 연중 제5주일 –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것이 결혼하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해도 될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부였던 첫 네 명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물고기가 많이 잡히게 만드는 기적을 보여주시고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은 재물은 물론이요, 세속적인 인간관계까지 포함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사람 낚는 어부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재물에 대한 욕심뿐만 아니라 가족과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신앙체험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수도자들의 입회가 줄어든 지는 꽤 되었습니다. 거의 젊은 사람들이 수도자가 되려 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나마 사제가 되는 성소자는 좀 있었지만 이마저도 급감하고 있습니다. 올해 수원교구가 신입생이 간신히 10명을 넘겼고 서울 대교구를 포함한 다른 교구에서는 없거나 10명 이하입니다. 신학교를 없애는 교구도 있습니다. 운영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제 성소, 수도자 성소가 주는 이유는 단순히 젊은 사람이 부족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매력’을 잃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런 삶이 더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와중에 저는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삶이 결혼하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결혼한 분 중에 싫어하는 사람이 생기고 사제 중에도 자신이 결혼생활을 포기한 고통이 얼마나 큰 희생인지 알아주는 것 같지 않아서 이런 말에 반대합니다. 하지만 사제와 수도자, 부모들조차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삶이 결혼하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면 어떻게 자녀들이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우선 ‘행복’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행복은 크게 ‘존재적 행복’과 ‘소유적 행복’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존재적 행복이란 아이가 태어나서 엄마 품에 안기는 것이고, 소유적 행복이란 엄마가 주는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행복입니다. 둘 다 ‘생존’에 관계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생존이 위협받을 때 느끼는 감정을 ‘불안’(不安)이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이 불안을 해결하는 데 집중됩니다. 생존을 위해 소유를 늘려 불안을 해소하려 하고, 또 나의 생존을 책임져 줄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 행복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명예를 가졌더라도 자살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근본적으로 존재적 불안을 해소하지 않으면 사람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엄마가 어린아이에게 먹을 것과 장난감을 충분히 주고 아이를 혼자 집에 둔다면 아이는 소유적 행복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런 것도 어머니의 존재가 옆에서 있을 때 즐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참 행복은 어린이처럼 나의 생존을 책임져 줄 자신의 창조자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때 옵니다.
그런데 부모가 나의 생존을 끝까지 책임져 줄 수 있을까요? 부모도 죽습니다. 결국, 죽음은 누구도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이때 죽지 않으려고 더 가지려 하는 게 옳을까요, 아니면 창조자를 찾음이 옳을까요? 창조자를 찾으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더 이상 생존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처럼 그 하느님께 양심적으로 나아갈 수 없는 죄를 짓고 산다면 어떨까요? 스스로 죽음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부모를 거부하는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부모와 함께하고 싶으면 부모 뜻을 따르고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마음에 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칠 태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할 때 주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셔서 다 책임져주신다는 참 평화를 누립니다. 오늘 예수님은 어부들을 이 평화로 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목숨을 바쳐 선교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일수록 주님께 더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더 행복합니다.
문제는 그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소유의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진 재산도 포기해야 하고 심지어 결혼생활도 포기해야 합니다. 결혼생활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지만, 더 큰 행복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결혼의 삶이 오히려 방해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일을 위해 결혼하지 않는 편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괜한 고통을 겪으며 참 행복을 위해 에너지를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록도에 불교를 전하러 갔던 스님이 신도들의 믿음 때문에 오히려 성령을 받아서 개신교 선교사가 된 이민교 선교사가 있습니다. 본래 죽음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한 상태로 성장하였습니다. 골수 원불교 가정에서 원불교 교무(교역자)가 되기로 예정된 코스를 밟아야 하는 것이 그의 숙명이었습니다.
고3 때 죽음에 대해 체험을 하고 싶어서 소록도에서 봉사합니다. 소록도병원 한 간호사가 성탄 행사에 간다면서 그에게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따라간 곳이 가톨릭 성당이었다. 미사를 드리는 중에 갑자기 환자들이 죽 일어서 뭘 하나 받아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도 한센병약이나 되는 줄 알고 얼떨결에 일어서 눈을 질끈 감고 성체를 받아먹었습니다. 나중에서야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 그는 말합니다.
“그게 예수님의 살을 상징하는 성체였다니…. 저도 모르게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예식에 처음으로 참여한 셈입니다. 아마 저를 예수님께로 이끄시려는 하느님의 오묘한 물밑작업이 시작되지 않았나 합니다.”
그는 한 가톨릭 신자의 초대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게 하시기 위해 당신 생명을 우리 안에 넣어주신 체험이었습니다.
스님이 된 이후에도 그는 소록도에도 자주 갔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전교를 당했습니다.
“우리가 문둥이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어. 문둥이가 아니었다면 한평생 멋모르고 살다가 지옥에 갈 수도 있었을 텐데…. 하나님은 우리를 문둥이로 만들어주셔서 이제는 예수 믿고 영생을 얻었으니 살아도 천국에 살고, 죽어서도 천국에 갈 수 있어. 그러니 우리는 지금 행복해.”
불교 교리에 의하면 ‘전생에 당신들이 지은 죄로 인해 이생에 문둥이라는 과보를 받았다’라고 보는 게 맞는데, 그들이 자신을 더 불쌍히 여기는 것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인과응보가 아닌 축제의 장이었습니다. 이렇게 죽음의 문제로 혼란스러워할 때, 어느 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1988년 3월 2일 그날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틈만 나면 소록도로 가던 저는 그날도 소록도 법당에 있었습니다. 그날도 평소처럼 새벽 4시에 일어났습니다. 법당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30분간 좌선을 한 다음 목탁을 치며 염불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염불이 되지 않고, 엉뚱한 말이 입안을 맴돌았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딱딱딱) 며칠 후 며칠 후... (딱딱따) 요단강 건너가…. (딱딱딱)’. 화들짝 놀랐습니다. 처음엔 ‘내가 멸치가 먹고 싶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만하려고 해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그것은 장의사 아르바이트할 때 개신교인 장례식에서 들었던 찬송가 가사였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염불을 해야 하는 법당에서 아무리 땡중이지만 입에서 찬송가를 부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 그런데 혀가 멈추지를 않아요. 혀가 제멋대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하다가 뜻 모를 소리까지 외쳐댔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 방언이 터졌던 것 같습니다. 굉장한 쇼크였습니다.”
그는 개종하여 목사가 되기로 합니다. 이때부터 영적인 시련과 부딪혀야 했습니다. 귀신이 차 뒷자리에 앉았다고 옆자리에 앉아서 큰 사고가 났습니다. 얼마 동안 잠자는데 오줌을 싸거나 대변이 나오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그 모든 두려움을 끊어내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아내도 생기고 어린 자녀도 둘이나 생겼습니다. 아내는 약사였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를 우즈베키스탄이란 나라로 부르십니다. 이민교 선교사는 약국을 팔고 아이들을 데리고 자신을 따라올 것을 아내에게 권고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이혼하자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는 혼자 떠납니다.
나중에 아내는 마음을 바꾸어 약국을 정리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우즈베키스탄이란 나라로 남편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아내는 갑상선 질환으로, 첫째 아이는 급성 신우신염으로, 둘째 아이는 결핵으로 크게 고생합니다. 그리고 그쪽 동네 청년들은 “저녁 8시까지 옥상에 돈과 담배를 갖다 놓지 않으면 너희 애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농아 축구단 감독을 병행하며 선교를 하고, 많은 것이 정리되었지만 그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일단 하느님을 체험하고 알게 되었으니 너무나 행복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고민하던 죽음의 불안이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이때 장애가 되는 것은 역시 가족들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려면 부모도, 아내도, 자녀들도 미워해야 하는 상황이 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하신 다음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물고기 잡는 게 행복하겠니, 사람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하는 게 행복하겠니?”
물고기를 잡는 것은 소유의 행복을 말합니다. 그러나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하면 존재의 행복을 누립니다. 하지만 그 존재적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결혼도 가족을 구원하고 자녀에게 신앙을 물려주는 등, 엄청난 선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소유의 행복을 포기하기 어려운 환경입니다. 이에 저는 참 행복을 위해서는 사제나 수도자가 되어 영혼 구원에 투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혼하는 것보다 더 행복한 삶이라 말합니다.
기분이 나빠도 어쩔 수 없습니다. 똑같이 행복한 것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길을 가고 있는 사람까지 그러면 누구도 이런 행복을 추구할 꿈도 꾸지 못하는 환경이 될 것입니다. 아주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주님 뜻을 따르는 수월함에 있어서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삶이 더 행복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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