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길

주현미 - 가슴 아프게(1967)

松竹/김철이 2021. 12. 9. 00:10

주현미 - 가슴 아프게(1967)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LYX-kNjxDh0

 

 

 

 

 

노래 이야기

 

1970년대 한국 가요계를 쌍끌이했던 대표적인 라이벌 가수는 누가 뭐래도 바로 남진선배님과 나훈아선배님이었습니다.

 

귀공자 스타일의 남진 선배님과 터프가이 스타일이었던 나훈아 선배님은 상반된 매력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달랐죠. 목포 출신으로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나 밝은 피부톤을 가졌던 남진 선배님은 도회적인 느낌의 노래들을 많이 불렀구요. 이와는 대조적으로 부산 출신에 선원의 아들로 태어난 나훈아 선배님은 시골의 정서와 향수를 노래하며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두 선배님은 노래스타일과 창법 또한 달랐는데요. 어릴 때부터 팝송을 즐겨 부르던 남진 선배님의 우상은 엘비스 프레슬리였구요. 그래서 마음이 고와야지’ ‘그대여 변치마오’ ‘님과 함께등의 노래들을 시원시원한 보컬과 경쾌한 리듬으로 꿈과 희망을 노래했죠. 한편, 나훈아 선배님은 애절하면서도 한이 서린 듯한 목소리에 특유의 꺾기가 더해지면서 슬픔을 노래한 경우가 많았는데요.

남진이 최고다’, ‘나훈아가 최고다’, 팬들의 목소리는 저마다 달랐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두분 다 최고의 스타였고, 지금도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는 최고의 선배님임과 동시에 최고의 라이벌이 있었기에 두 분 모두 영롱하게 빛날 수 있었다는 사실일 겁니다.

 

오늘은 두 분의 여러 히트곡 중에서 남진 선배님을 슈퍼스타로 발돋움하게 만들어준 노래 가슴 아프게를 소개해드리려고 하는데요.

 

가수 중에는 데뷔곡이 크게 히트해서 스타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남진 선배님의 경우엔 그렇지 못했습니다. 전라남도 목포에서 목포일보의 발행인이자, 5대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의 늦둥이 겸 차남으로 태어난 남진 선배님은 어린 시절부터 연극과 음악에 심취했구요. 팝송을 잘 불러서 가수 제의를 받았지만, 영화배우가 되고싶은 마음에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하면서 서울로 상경합니다. 그러다 당시 최고 인기가수

남일해 선배님의 곡을 만들었던 작곡가 한동훈 선생님을 소개받았고,

1965년 드디어 첫 음반을 레코딩하는데요. 데뷔곡이었던

서울 푸레이보이는 주목도 받지 못한 채 묻혀버렸구요. 심기일전해서 다시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하지만, ‘연애 0번지라는 노래제목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남진 선배님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앨범 맨 마지막에 수록됐던 울려고 내가 왔나라는 트로트곡이 대히트를 하면서 남진이라는 이름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됐거든요. 사실, 이 노래는 작곡가 김영광선생님이 남진 선배님에게 준 노래였지만, 트로트 부르는 게 창피하다면서 거절하던 남진 선배님이 앨범의

맨 마지막에 숨겨놓은 노래였는데, 오히려 이 노래가 성공을 가져다준 거죠.

 

연기를 전공했던 남진 선배님은 인기를 얻으면서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문희씨와 함께 영화에서 주연을 맡게 되는데요. 1967년 개봉한 그 영화 제목이 바로 가슴 아프게였고, 남진 선배님은 주제가인 가슴 아프게를 직접 노래하면서 이때부터 영화배우로, 가수로 빅스타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가슴 아프게가 수록된 앨범은 발매 한 달 만에 이미자 선배님의 음반을

누르고 전국 레코드 판매 1위에 올랐고요. 남진 선배님은 처음으로 1967MBC 10대가수에 선정되며 슈퍼스타로 각광 받았고,

이때부터 인기 영화배우로 50편의 영화에도 출연하며

최고의 엔터테이너로 사랑받게 되죠.

 

1967년 박상호 감독님이 연출했던 영화 가슴 아프게는 이루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였습니다. 올겐니스트인 재일교포 경아는 고국 방문 공연차

내한하여 젊은 인기가수 성진을 사귀게 되고요. 같이 순회공연을 하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했지만, 순회공연이 끝난 후, 경아는 사랑만을 남긴 채 다시 일본으로 떠나야만 했고요. 성진은 그녀와의 사이에 놓인 현해탄을

원망하며 안타깝게 그녀를 배웅한다는 스토리였는데요. 연인들의 애달픈 이별을 더 슬프게 만들어준 것은 뭐니뭐니해도 주제가였죠.

 

"가슴 아프게"의 작사가는 정두수 선생님인데요. 이 노래에 대한 작사 비화를 직접 한 신문에서 이렇게 밝힌 적이 있었습니다.

 

”1966년에 레코드사 사장이 거금 5만원 주면서 영화주제가로 쓸 노랫말 좀 만들라고 통사정을 하는거야. 영화에서 통통통 뱃소리가 들리길래

내가 살던 부산 광안리를 다녀오고 싶었지만, 너무 멀어서 가까운 인천 연안부두로 달려갔지. 그런데, 연안부두에 안개가 어찌나 자욱했던지..’

저놈의 안개만 없었다면 가슴이 뻥 뚫렸을 텐데'라는 시상이 떠오르더라구. 그래서 가사를 써내려갔지. 그 노래가 바로 가슴 아프게가 된 거야

 

정두수 선생님은 일필휘지로 가사를 써내려간 다음, 공중전화로 달려가서 작곡가 박춘석 선생님에게 가사를 불러줬고요. 박춘석 선생님은 예전에

손인호 선배님이 불렀지만, 히트가 안된 곡에 그 가사를 붙여

편곡을 했다고 하죠.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곡이

바로 남진 선배님의 가슴 아프게라는 명곡이 되었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해 저문 부두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 마음같이

목 메어 운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해 저문 부두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 마음같이

목 메어 운다

 

발표되자마자, 대중가요계를 평정한 가슴 아프게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도 없었을 것을이란 가사 덕분에 바다 건너

재일동포들에게도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는

망향의 노래로 불렸다고 하죠.

 

그래서일까요? 이 노래를 듣거나 부르면, 바다를 바라보며

그리운 고국의 고향을 떠올리면서 가슴 아프게 이 노래를 불렀을

애절한 마음이 느껴지고요. 사랑하면서도 아무말 못하고 떠나 보내야만했던 70년대의 가슴 아픈 순정도 떠오르고요. 요즘처럼 진심으로 사랑하기가 참 어렵다는 걸 깨닫는 시대에도 가슴 아픈 진정한 사랑 한번 해보고 싶다는 바람이 들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바로 명곡이 갖는 진정성이자,

그토록 오랜 세월 사랑받고 있는 이유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