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길

주현미 - 연락선은 떠난다(1937)

松竹/김철이 2021. 12. 1. 17:54

주현미 - 연락선은 떠난다(1937)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YK9olTIgVgM

 

 

 

 

노래 이야기

 

부산과 일본의 시모노세키 사이를 오가는 부관페리호를 아시나요?

한때는 부관페리호를 타고 신혼여행을 가는 커플도 있었고,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들도 많았는데요. 이 항로는 해방 이후 중단됐다가, 1970년에 재개되었습니다. 그리고, 해방 이전까지 부관페리호관부연락선이라는 이름으로 현해탄을 넘나들었고요.

1905년부터 운항된 관부연락선이 도착한 시모노세키항구는 강제연행되거나 징용된 조선인들이 일본 땅에 첫발을 딛게 되는 공포의 항구였습니다.

 

관부연락선일제의 대륙침략과 조선인 강제동원의 연결창구였고요. 일본인들은 희망과 기쁨에 젖어 신천지를 찾아 조선과 만주로 가기 위해 연락선을 탔지만, 조선인들은 가졌던 토지를 모조리 빼앗기고, 절박한 생존을 위해 이 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갔습니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들과 위안부는 일본 각지의 공사현장과 탄광 등지에서 민족차별과 인간 이하의 천대를 받으며 심지어는 학살을 당하기까지 했었지요.

그렇기에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인들의 상처와 슬픔과 원성이 맺혀있는 배가 바로 관부연락선이었습니다.

 

그러다 1937. 한 신인가수가 한 맺힌 관부연락선에 관한 노래를 발표합니다. 박영호 선생님이 작사하고, 김송규 선생님이 작곡한 장세정 선배님의 연락선은 떠난다인데요. 이 노래를 작곡한 김송규라는 이름은 바로 가수 이난영 선배님의 남편 김해송선생님의 본명입니다.

 

 

쌍고동 울어 울어 연락선은 떠난다

잘 가소 잘 있소 눈물 젖은 손수건

 

진정코 당신만을 진정코 당신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눈물을 삼키면서

떠나 갑니다 아아 울지를 말아요

 

파도는 출렁출렁 연락선은 떠난다

정든 님 껴안고 목을 놓아 웁니다

오로지 그대만을 오로지 그대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한숨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아아 울지를 말아요

 

바람은 살랑살랑 연락선은 떠난다

뱃머리 부딪는 안타까운 조각달

언제나 임자만을 언제나 임자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끝없이 지향없이

떠나갑니다 아아 울지를 말아요"

 

 

노래 가사만 보면 그저 사랑하던 연인과의 평범한 이별 장면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음미해보면 이별과 눈물의 의미가 범상치 않습니다. 식민지의 고통과 한을 담아서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민족이라면 누구나 체감할 수 있었는데요.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 땅으로 떠나면, 그 길이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는 아득한 황천길이었던 그 시절.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던 우리 동포들은 연락선은 떠난다의 구슬픈 곡조에 가사를 바꿔서 자신의 처연한 심정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이죠.

 

무엇을 원망하나 나라가 망하는데

집안이 망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구나

실어만 갈 뿐 실어만 갈 뿐

돌려보내 주지 않네

눈물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연락선은 지옥선

 

이렇듯 우리 민족의 처절한 삶과 한을 다룬 노래 연락선은 떠난다를 불렀던 장세정 선배님은 1921년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생후 두 달 만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마저 만주에서 독립단에 들어간 후 소식이 끊기자, 장세정 선배님은 조부모의 슬하에서 자라났지요. 부모를 잃은 쓸쓸함을 항상 노래로 달래던 선배님은 십대 후반, 평양 화신백화점의 악기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는데요. 그러다 1936년 늦가을, 평양방송국 개국기념 가요콩쿨 무대에 올라서 노래를 불렀고, 이 모습이 오케레코드사의 이철 사장의 눈에 띄어 서울로 스카웃되는데요. 1937, 오케레코드에서 처음 취입한 데뷔곡이 바로 연락선은 떠난다였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아이러니한 사실은 연락선은 떠난다가 힛트한 이후, 1951년 일본의 엔카 가수인 스가와라 쯔즈코가 이 곡을 연락선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번안 취입해서 크게 힛트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일본사람들은 그 노래가 한국의 노래라는 사실을 모른 채, 지금도 그들이 만든 노래로 알고 있다고 하는데요.

이 노래에 담긴 조선인의 한과 설움을 과연 그들이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가 궁금해집니다.

장세정 선배님의 창법을 전문가들은 이렇게 말하죠. ”죽죽 뻗어나가면서도 가볍게 코에 걸리는 달콤함을 속으로 간직한 창법이다!" 또는, "청초한 색기(色氣)를 느끼게 하는 창법이다!“ 글로만 적어서는 제대로 표현되지 않지만, 장세정 선배님의 노래를 귀 기울여 듣다보면, ! 이 표현이 참 절묘하구나! 실감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오케레코드사에서는 장세정 선배님의 음반을 소개할 때마다 반드시 평양이 낳은 가희(歌姬)’란 문구를 꼭 넣었습니다.

 

`처녀야곡', `눈물', `항구의 무명초', `역마차', `울어라 은방울' 등 여러 히트곡들을 발표하면서 해방이후에도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장세정 선배님은 활동을 중단하게 됩니다. 왜냐면, 조명암, 박영호 등 월북 작사가들의 노래를 주로 많이 불렀기 때문에 장세정 선배님의 노래들이 거의 금지곡이 됐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1970년대엔 주로 가수 신카나리아선배님이 운영하던 카나리아다방에 나와서 즐거운 옛추억담으로 하루를 보냈다고 전해지는데요. 더 이상 가수활동을 할 수 없었던 장세정 선배님은 결국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1978. 미국 LA에서 은퇴기념공연을 펼쳤습니다. 그러다 1988KBS 가요무대 미주특집 LA 공연에서 반가운 모습을 만날 수 있었는데요. 휠체어에 의지한 채로 등장해서 동료 가수였던 김정구 선배님, 조용필 선배님, 백설희 선배님과 격한 포옹를 나누기도 했지요.

 

오랜 투병 끝에 2003년 향년 82세의 나이로 하늘의 별이 되셨지만, 장세정 선배님의 노래를 사랑하는 팬들은 세대를 넘어 그 목소리를 그리워하고 계실텐데요. 아름다운 목소리로 우리 마음 속의 영원한 가희(歌姬)로 눈물과 서러움을 달래주었던 연락선은 떠난다를 감상하시면서 노래에 맺혀있는 서글픈 이별의 정서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