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길

주현미 - 코스모스탄식(1939)

松竹/김철이 2021. 10. 31. 00:36

주현미 - 코스모스탄식(1939)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wx1iX7crXss

 

 

 

 

노래 이야기

 

코스모스는 가을의 전령사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장미나 백합처럼 빼어난 자태와 향기를 짙게 풍기지는 않지만,

소박하고 청순한 이미지로 해맑은 가을을 수놓는 꽃이 바로 코스모스이지요.

바람 불 때마다 한들한들 흔들리는 모습은 부끄러움을 타는 청순한 아가씨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하죠.

 

그래서 일까요? 우리 가요에는 가을노래 중에 코스모스가 등장하는 노래들이 유난히 많습니다. 김상희 선배님의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 백설희 선배님의 코스모스 순정’, 박재란 선배님의 코스모스 사랑’, 이외에도 코스모스 추억’ ‘코스모스 피는 사연과 같은 노래들이 가을이면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요.

 

1939년에 발표된 박향림 선배님의 코스모스 탄식역시 가을이면 생각나는

우리의 옛가요입니다.

가수 박향림 선배님의 이름이 생소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겠지만,

오빠는 풍각쟁이야라는 노래를 모르시는 분들은 없으실 겁니다.

오빠는 풍각쟁이야이 뭐 / 오빠는 심술쟁이야 뭐라는 재미있는 가사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박향림 선배님이 17살 때 발표했던 곡인데요. 1990년대 중반, 한 방송사

예능프로그램의 흘러간 옛 가요를 소개하는 코너에 소개되면서 재조명받고, 심지어

노래방 애창곡으로 사랑받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오빠는 풍각쟁이야를 부른 가수가 누군지는 모르시는 분들도

많았는데요. 소녀풍의 당돌하면서 독특했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1930년대를 대표했던 가수 박향림 선배님입니다.

 

오빠는 풍각쟁이야를 재미삼아 따라 불러본 분들이라면 모두 느끼셨겠지만, 이 노래를 들을 때와는 달리 직접 부르면 여간 부르기 까다로운 노래가 아니라고들 하지요.

원곡을 부른 박향림선배님의 독특한 창법뿐만 아니라, 음의 오르내림과 콧소리를 모두 살리기가 쉽지 않다고 많은 가수들이 말하는데요. 그만큼 박향림 선배님의

노래실력은 뛰어나기로 정평이 나있었죠.

 

가요는 그 시대 주민들의 마음속 풍경을 고스란히 대변해준다고 하지요. 일제강점기 시절. 아픈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 어디에도 호소할 곳조차 없던 그 시절, 가수의 노래를 유성기로 들으며 한과 쓰라림을 달랬던 그 시절에 혜성처럼 나타난 박향림 선배님은 깜찍하고 발랄한 음색과 당돌함이 느껴지는 창법으로 잠시나마 밝은 기분을 느끼도록 해주었던 가수였습니다.

 

박향림 선배님이 본명은 박억별입니다.

선배님이 태어난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은 온천으로 유명한 마을이었는데요.

열여섯이 되던 1937년에, 주을온천에 서울에서 오케연주단이 도착해서 공연을

펼쳤고요. 그 공연을 보고 마음을 삣긴 열여섯 소녀는 무대 뒤로 찾아가 작곡가

박시춘선생님에게 대뜸 이렇게 말했다고 하죠.

일류가수가 되어서 효도를 하고 싶어요.”

 

이를 갸륵하게 생각한 박시춘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노래 솜씨를 듣고난 다음, 대번에 마음에 들어했지만, 오케연주단의 단장이자, 오케레코드사를 대표했던 이철 사장은 주저했습니다. 이미 오케레코드사에는 이난영, 장세정, 이은파 등의 최고 여성가수가

있었기 때문에 또다른 여자가수를 데뷔시킬 생각이 별로 없었던 거였죠.

 

결국, 오케레코드사에서 거절을 당한 열여섯 소녀는 경성으로 상경해서 태평레코드사를 찾아가 오디션을 보게 됐고요. 태평레코드 문예부장이었던 박영호 선생님으로부터 곡을 받아 박정림이라는 이름으로 첫데뷔앨범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풍부한 성량을 바탕으로 답답한 속을 확 트이게 하는 매력의 목소리로 대중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으며 인기가수로 사랑받았고요. 이후, 여러 곡이 히트하게 되자 콜럼비아레코드사로 전격 스카웃되었고, 이때부터 함경도 소녀 박억별은 박정림을 거쳐 박향림이란 예명의 인기가수로 활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만난 소중한 인연이 바로 가수 이난영 선배님의 오빠인 작곡가 김해송 선생님인데요. ‘오빠는 풍각쟁이야라는 김해송 선생님의 곡을 받아 박향림 선배님 특유의 간드러진 콧소리로 노래해서 힛트시키고요. 김해성 선생님과 듀엣으로

전화일기란 노래를 부르기도 했죠.

 

박향림 선배님의 인기가 너무 높아지니까, 당황한 곳은 바로 지난날 박향림 선배님을 퇴짜놨던 오케레코드사였습니다. 당대 최고의 가수들은 모조리 오케레코드사로 집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이철 사장은 많은 이적료를 지불 하면서 박향림선배님을

기어이 오케레코드사로 이적시켰고요. 박향림 선배님이 오케레코드로 옮겨와서

첫 취입곡으로 발표한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코스모스 탄식'입니다.

 

1939년 조명암 선생님이 가사를 쓰고, 작곡가 김해송 선생님이 곡을 쓴

코스모스 탄식은 두만강을 배경으로 청춘 남녀의 사랑을 그린 노래입니다. 코스모스 피어날 때 맺은 인연이 코스모스 지고 나면 헤어진다는 신파조의 가락이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죠.

 

 

코스모스 피어날 제 맺은 인연도

코스모스 시들으니 그만이더라

국경 없는 사랑이란 말뿐이더냐

웃으며 헤어지던 두만강 다리

 

해란강에 비가 올 제 다정턴 님도

해란강에 눈이 오니 그만이더라

변함없는 마음이란 말뿐이더냐

눈물로 손을 잡던 용정 플랫폼

 

두만강을 건너올 제 울던 사람도

두만강을 건너가니 그만이더라

눈물 없는 청춘이란 말뿐이더냐

한없이 흐득이던 나진행 열차

 

 

일제 강점기였던 1930년대는 고향을 떠나 타지로 이리저리 삶의 터전을 옮겨다니는 유이민들이 많았었고, 특히 간도 이주가 대규모로 이뤄진 시기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뒤에 남긴 채, 나진행 열차에 몸을 싣고 용정 플랫폼을 떠나던

청춘 남녀들, 고달픈 유이민의 삶이지만 그래도 청춘은 있었고, 애절한 사랑이 있었던 그 시절의 정서를 고스란히 노래속에 담아낸 코스모스 탄식은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의 노래로 사랑받았습니다.

 

일제 암흑기의 시기 동안 악극단에서 활동을 이어가던 박향림 선배님은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악극단 가수로 활동하면서 전국을 순회하며 노래했습니다. 그러다, 1946년 혼인을 하고, 아기를 가진 몸으로도 여전히 무대에 오르며 쉴새 없이 공연을 했는데요.

바쁘게 공연일정을 소화하던 도중, 어느 지방에서 해산을 했지만,

제대로 산후조리조차 못한 채 또다른 지방공연을 소화했던 박향림 선배님은

결국, 공연 중에 쓰러지고 맙니다.

황급히 병원으로 실려갔지만, ‘산욕열이라는 병명만 확인한 채..

영영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스물다섯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우리 곁을 영영 떠난 박향림 선배님.

 

누군가 말했지요. 가을바람에 코스모스가 흔들리는 모습은

마치 그리움이 물결치는 모습과 닮아있다고요.

아마도 코스모스 탄식을 들을 때마다.. 팬들의 가슴 속엔

박향림 선배님에 대한 그리움이 아련하게 물결 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