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비폭력 민족운동가

松竹/김철이 2020. 10. 19. 08:13

비폭력 민족운동가

 

 

고당 조만식 선생님은 일제강점기에
3.1 운동을 주도하고 교육 활동과 물산장려운동,
축구 통제령 반대운동, 국내 민간 자본으로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이끌었습니다.

특히 인도의 지도자 간디와 유사한 점이 많은데
비폭력 무저항의 정신으로 외세를 대하고
민중을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조만식 선생님에게는 누구를 이겨내고
해치워야 할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당신이 원하는 것은 민족 운동을 통해서
모두가 더 부유해지고 더 현명해지고,
더 자유로워지고, 더 행복해지는
것뿐이었습니다.

평생 자신의 고향인 평안도에서 사시던
조만식 선생님은 해방 후 이북에 소련 군정이 들어왔음에도
1945년 11월, 한국 최초의 우파 기독교 정당인
조선 민주당을 창당하셨습니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조선에 대한 5년간의 신탁 통치안이 결정되자
1946년 1월 2일 소련 군정에 신탁통치
불찬성의 뜻을 통고하고 한편으로는
반탁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1946년 1월 6일 소련 군정 및 김일성 일파와의
최후 담판은 결렬되고 선생님이 인민위원회
건물 현관을 나서자 이미 소련군에 의해서
고려호텔로 연행되어 갔습니다.

그 후 공개적인 장소에서 조만식 선생님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지인과 제자들이 월남을 권유했지만
딱 잘라 거절하며 말했습니다.

“김일성과 소련의 공산당 치하에서 우리 북녘 동포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할 때 내가 남으로 가게 된다면
북녘의 동포들은 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일천만 북녘 동포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이미 굳게 결심하였다.

이후 아내인 전선애 여사와 자녀들에게
월남을 권유하며 떠나기 직전 자신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남겨주었다고 합니다.

현재 국립 서울현충원에 있는 조만식 선생님의
묘역에 이를 안장한 것입니다.

 

적을 만들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더 사랑하는 방법으로
세상을 이끌었던 조만식 선생님은
자신보다 남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정신을 존경합니다.

 

# 오늘의 명언
고향을 묻지 말고 일해 나가자.
인화와 단결이야말로 국권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나라가 독립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다.
– 고당 조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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