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신적인 현실, 사랑 | 서강휘 임마누엘 신부님(검암동 본당 주임)

松竹/김철이 2025. 6. 2. 10:15

신적인 현실, 사랑

 

                                                     서강휘 임마누엘 신부님(검암동 본당 주임)

 

 

학생들에게 동양철학을 가르칠 때 ‘하늘(天)’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느냐고 묻습니다. 학생들은 난 감해합니다. 지상에서 가장 높은 산 위부터가 하늘 인지, 아니면 과학적으로 정해진 특정 높이부터 하 늘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저 높은 창공’ 정도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 늘’을 의미하는 천(天)이라는 글자는 그 형성 초기 에 다음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 이 글 자의 모양은 사람의 머리끝을 가리키지만, 글자가 기호화되면서 과 같은 형태가 되었으며 더 후대 에 ‘天’으로 표기되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한자 의 형성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설문해자(說文 解字)』에서는 이 글자가 ‘사람의 머리끝’을 가리킨 다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하늘은 ‘저 높은 창공’이지만 그 시작은 언제나 인간의 구체적 현실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사도행전은 그 때의 일을 이렇게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들이 보는 앞에서 구름에 가리어 하늘로 오르십니 다. 그들과 동고동락했던 스승, 다시 살아나신 주 님이 새로운 차원, 신비의 영역으로 건너갑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더 높은 차원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그분의 일이 새롭게 조망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 “왜 하늘을 쳐다보 며 서 있느냐?”(사도 1,11)라며 주위를 환기합니다. 하늘로 향한 시선을 다시 현실로 내려오도록 유 도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과 저자가 같은 것으로 알려진 루카 복음에서도 두 명의 천사가 등장합니 다. 부활 사건을 묘사한 대목에서 그 두 천사는 무 덤에서 예수님을 찾는 여인들에게 “어찌하여 살 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느냐”(루카 24,5)라며 꾸짖습니다. 승천의 신비함에 빠져 하늘 에서 눈을 떼지 못한 제자들을 책망한 것처럼, 예 수님을 지상에 묶어 두려 한 여인들을 각성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느님의 일이 인간 에게 어떤 의미로 존재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듯 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땅에 매여 있지 않지만, 그 분이 건너가신 하느님의 하늘은 인간의 정수리라 는 구체적 현실과 늘 맞닿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 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눈으로 삶을 바라보는 태도입 니다. 그것은 목전의 현실에 구속되지 않으면서도 허공에 매달린 무책임한 도피가 되어서도 안 되는 초월적 현실입니다. 이것이 하늘 ‘천(天)’이라는 글 자가 담지(擔持)하고 있는 의미입니다. 육체의 생 존을 넘어서면서도 맹목적 종교 행위가 되지 않도 록 하는 일.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 은 생존에 얽매였던 삶을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시 킵니다. 하늘로 이어지는 일입니다. 하지만 사랑 은 때론 뒤엉켜 혼란스러워 보이는 우리의 구체적 삶을 통해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땅으 로 내려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모든 일 의 증인이 되라고 분부(루카 24,48 참조)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그 소명은 그래서 사랑의 소명이며 지상에 내려진 하느님의 명인 천명(天命)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 지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으로 초월하고 사 랑 안에서 살아있는 하느님의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