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이삭 | 예수님이라면 이럴 때⋯
예수님이라면 이럴 때⋯
요즘도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마치 기다리기라 도 했던 것처럼 떠오르는 말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일 입니다. 지금도 살고 있는 길음동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였습니다. 신부님께서 강론을 하셨습니다. 강론을 듣는 내내 감동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잊히지 않는 말씀 하나가 있습니다. 신부님께선 어떤 일에 대한 판단을 내 려야 할 때, ‘당신의 판단이 옳은가? 가장 온전한 판단인 가?’ 질문하고, 그 답을 찾기 어려울 때면 예수님께 묻는 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결정하셨을 까. 예수님이시라면⋯.’ 예수님께 기도드리고 기도의 응 답을 받아 결정을 내린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정신이 확 들었습니다. ‘그렇다! 예수님이시라면 이럴 때 어떤 결정을 하셨을까. 예수님의 저울로 옳고 그름, 진정과 그름을 밝혀보려는 노력을 해 야지!’ 결심했습니다. 사노라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무언 가를 결정해야 할 일이 생깁니다. 생각도 결정하고 행동 도 결정하고 관계도 결정해야 합니다. 이럴 때 그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건 대부분 저의 욕심들입니다. 그 욕심을 움직이는 것은 ‘꾀’입니다.
그런데 꾀로 무엇을 결정하고 나면, 일단 무슨 이익이 생긴 것 같은 마음이 들긴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뒤를 돌아보게 되면 늘 창피합니다. 꾀로 결정한 것들이 다 저를 위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저를 망친 게 대부분입 니다.
삶은 속여지거나 감춰지는 것이 없으므로 저의 불결한 정신이 느껴져서 한없는 수치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 수치심도 바로보기가 싫어서 수치심을 몰아내기 위해 여 러 가지 변명들을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변명을 만들어 내면 낼수록 몸에 지저분한 것들이 가득 찬 듯 무겁고 정 신이 병든 느낌에 괴롭습니다. 꾀를 부리지 말고 진정으 로 진심으로 진실하고 성실한 결정을 내려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
글을 쓰는 일에도 꾀가 활동을 합니다. 읽는 이를 속여 서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로 보이게끔 치장합니다. 본질 보다는 미사여구로 감성을 자극하기도 하고 사실을 잘 헤 아려 확인하지 않은 글을 쓰기도 합니다. 저도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 부끄러워 책으로 묶지 못하는 소설이 여러 편입니다. 독자들에게 재미를 준다는 핑계로 화사하 게 화장을 시킨 글들이라는 걸 누구보다 저 자신이 잘 알 기 때문에.
꽤 많이 살았습니다. 지구를 떠날 날들이 저 앞에 아롱 아롱 보이는가 싶기도 합니다. 이럴 때, 다시 신부님의 말 씀을 떠올립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