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간 소통

말씀의 이삭 | 고향 양양의 성당엔 ‘안나’의 시간이 있다

松竹/김철이 2025. 5. 6. 12:40

고향 양양의 성당엔 ‘안나’의 시간이 있다


서울주보에 글을 쓰려니 어린 날의 양양성당을 떠올리 이경자 안나 | 소설가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평소에 늦잠꾸러기에다 게을렀 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곳은 제 유년의 정신의 집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성당 건물은 양양에선 볼 수 없는 건 축물.

수녀님은 얼굴과 손목 이외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옷을 입고 계셨습니다. 사시사철 그랬습니다. 머리카락 한 올 드러내지 않는 차림, 그리고 고개를 조금 숙이고 걷 는 자세. 그런 수녀님을 보면서 ‘나도 수녀님이 되어야지.’ 하는, 그런 희망도 가졌습니다. 두 분 수녀님이 계셨는데 나이가 좀 있으신 수녀님은 큰 수녀님, 다른 한 분은 작은 수녀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양양성당을 떠나온 지도 거의 60 년이 지났는데, 지금 추억하니 어제처럼 생생합니다. 나 이가 들면 어제 일보다 옛날이 더 잘 기억난다는 말이 맞 나봅니다.

1958년 성탄 대축일에, 그때의 표현으로, ‘영세를 받 았습니다.’ 주기도문과 요리문답을 외워서 시험을 쳤고 합격했었습니다. 성탄절은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 예수님의 어머님이신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를 세 례명으로 정했습니다. 안나로 살고 싶었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성당. 매일 새벽 미사가 있었습니다. 이른 새벽에 성당의 언덕길로 달려 올라가곤 했습니다. 성당 바닥은 나무판자를 깐 마룻바닥. 겨울이면 그 틈새로 살얼음 같 은 바람이 치고 올라왔습니다. 그래도 차가운 마룻바닥 에 무릎을 꿇고 앉아 미사를 드렸습니다. 낡고, 여기저기 헝겊을 대서 기운 내복에 바지나 치마를 입었던 그맘때의 겨울 옷차림으로.

미사를 드리고 성당을 나오면 무언가 다른 내가 되어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평소에 늦잠꾸러기에다 게을렀 던 저. 하지만 평소와 다른 제 이런 태도를 엄마는 아주 의아하게 여기셨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알지 못했습니다. 하얀 종이나 다름없던 제 정신에 드리운 성스러운 교회의 모든 것들, 그 경건한 신앙에 스며들던 어린 저의 세계를. 나쁜 짓도 하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왜냐하면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봐야 하는데 나쁜 것을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동생을 때렸다거나 거짓말을 했다거나 누구 를 미워했다거나….

사춘기 소녀가 되었을 땐 ‘수녀님’이 되고 싶어서 한 번 은 진지하게 의논하기도 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독일로 유학을 가야 한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의 나. 현실로부터 붕 떠나 다른 세계로 삶을 이전하는,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안나로 살기 시작했던 유년과 사춘기 시절은 제 삶의 소중한 시 간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