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하느님의 어리석고 애절한 사랑 | 정승익 바실리오 신부님(중2동 본당 주임)

松竹/김철이 2025. 3. 30. 09:45

하느님의 어리석고 애절한 사랑

 

                                                                          정승익 바실리오 신부님(중2동 본당 주임)

 

 

어느 한 조각가가 있었다. 그에게는 이루지 못 했던 첫사랑이 있었다. 그 사랑을 평생 그리워하 고 다시 한번 만나 보기를 기도했지만, 결국 만 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연인의 모습을 조각 해 보리라 다짐했다. 그것도 자신의 실력이 가장 무르익었을 그때 가장 좋은 재료를 구해 사랑하 는 연인과 작품으로나마 함께하고 싶었다. 드디 어, 평생의 걸작품을 남기기를 오매불망 꿈꾸었 던 그는 아주 좋은 대리석 재료를 발견하고,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그 돌을 샀다. 작업실에 옮겨다 놓 은 그 돌은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평범한 돌로 보 일 뿐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냥 돌덩어리가 아 니다. ‘이미’ 완성된 연인의 얼굴이 중첩되어 보이 는 애정이 담긴 특별하고 각별한 돌이다. 그런데 남들에게는 ‘아직’ 미완의 재료로만 보일 뿐이다. 그 이유는 적어도 그에게는 ‘아직’ 생각 안에만 보 이는 완전함이 ‘이미’ 온전한 상태로 실현된 모습 으로 함께 보이기 때문이다. 작품을 향한 조각가 의 사랑은 초라한 돌덩어리 곁을 한시도 떠날 수 가 없다. 미완성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그 돌의 처 지가 너무나 안쓰럽다.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하 다. 그래서 그는 늘 그 곁에 ‘어리석은 사랑’으로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하느님 사랑에 관해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조각가의 마음 (Voluntas Fabri)’으로 비유하기 를 좋아했다. 『마니교도 반박 창세기 주해』 1,5,8 에서 성인은 창세기 1장 2절 “하느님의 영이 물 (들) 위를 맴돌고 있었다.”라는 구절에 이 비유를 적용한다. 여기서 ‘하느님의 영’은 하느님의 ‘거룩 한 바람’으로 그분의 사랑을 말한다. 그리고 ‘물’ 은 복수로 사용할 때 주로 불완전하고 어두운 부 정적인 그 무엇을 상징한다. 바로 미완성으로 남 아 있는 우리 모두를 가리킨다. ‘맴돌고 있었다 (superferebatur)’라는 동사는 그 곁에 머물러 떠 나지 못하는 하느님의 ‘애절한’ 사랑을 뜻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말한다. 그분 의 사랑은 ‘자비 misericordia=miser(불쌍히 여 기는)+cor(마음)’이다. 산수로 계산될 수 없는 어 리석음이 묻어나는 초월의 사랑이다. 작품이 작가 에게 자기완성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그저 작가의 사랑 말고는 무엇으로도 설명할 길이 없는 은혜로움이다.

 

그래서 신앙은 ‘뻔뻔하게 내어 맡김’일 수밖에 없다. 무엇 하나 내세울 수 없는 인생의 초라한 성적표를 들고 눈물 젖은 눈으로 그분을 바라보 며,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 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 니다.”(루카 15,18-19)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 나 그분은 우리에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 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32 참조)라고 말 해 주시고, 거기에 잔치까지 베풀어 주신다. 주위 사람 특히 큰아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불공평과 공정하지 못한 이 ‘어리석은 사랑’을 무엇으로 설 명할 수 있을까? 이에 우리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사순절의 회개는 그분 사랑에 나 를 온전히 내어 드리는 그것 말고 또 무엇이란 말 인가? 늘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시는 그분께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어서 달려가자!